[책갈피 속의 오늘]1853년 美페리제독, 日우라가항 입항

  • 입력 2006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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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용이 왔다!”

1853년 7월 8일 오후 5시경. 미국의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 제독이 3500t급 흑선을 비롯해 대포를 장착한 네 척의 검은 증기선을 이끌고 일본의 에도(江戶·현재의 도쿄) 만 우라가(浦賀) 항에 나타났다.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미국 해군역사센터에 따르면 증기선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일본인들은 페리 제독의 기선을 보고 충격을 받아 ‘흑룡’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흑룡’들은 1852년 미국 노퍽 항을 떠나 대서양, 케이프타운, 인도양을 거쳐 중국 해안을 지나 220여 일 만에 일본에 도착한 미국의 통상사절단을 태운 배였다. 페리 제독은 수호조약 체결을 원하는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증기선에 혼비백산한 일본은 논란 끝에 친서를 접수했고, 페리 제독은 ‘1년 후 다시 올 때까지 가부를 결정하라’는 통고를 남긴 채 9일 뒤 일본을 떠났다.

다음 해 초 페리 제독이 다시 에도 만에 나타났을 때는 함선도 8척으로 늘어났다. 겁에 질린 일본인들에게 페리 제독은 철도와 기차 모형, 포도주와 위스키 등이 담긴 미합중국 대통령의 선물 꾸러미를 전달한다. 권총 사격 시범까지 보였다.

노쇠해진 일본 막부는 1854년 3월 31일 미국과 가나가와(神奈川) 화친 조약을 체결해 하코다테(函館)와 시모다(下田)를 개항하고 미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다. 미국 선박은 시모다 항과 하코다테 항에 정박할 수 있게 됐으며, 시모다 항에는 미국 영사관이 세워졌다.

말이 조약이지 일방적인 무력시위요, 굴복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이 조약을 ‘치욕’ 대신 ‘태평하게 잠자던 일본이 근대 국가에의 길을 걷게 만들어준’ 사건으로 기억한다.

개혁파가 앞장서 변화를 이끌었고 메이지(明治) 왕은 상투를 잘랐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됐고 미국과 일본의 교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서구 세계에 대한 일본의 문호 개방이 촉진됐다. 1871년에는 49명의 장차관급 정부 요인들로 신사유람단이 구성돼 1년 10개월 동안 서구 열강을 순방하면서 서양 문물을 배웠다.

서구에서 모든 것을 배운 일본은 마침내 미국과 맞먹는 경제대국이 됐다. 관계를 맺었던 서양 국가의 흔적을 부정하지 않고 문화를 보태 나간 결과였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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