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

  • 입력 2006년 5월 2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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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아이리스 장 지음·윤지환 옮김/331쪽·1만3000원·미다스북스

1937년 12월 중국 난징(南京)은 ‘살아 있음이 불길하게만 여겨지는 곳’이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7주간 학살한 중국인은 26만∼35만 명. 눕혀 놓으면 난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35km나 이어질 숫자이고 위로 쌓는다면 빌딩 74층 높이다.

더 끔찍한 것은 일본군이 희생자들에게 최대한의 고통과 수치를 주면서 학살했다는 사실이다. 남성은 총검술 연습, 목 베기 시합의 대상이었고 2만 명이 넘는 여성이 강간당했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다큐멘터리 작가인 저자는 1997년 이 책을 펴낸 뒤 일본 우익세력의 끝없는 협박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4년 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징 대학살이 규모와 잔혹함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2차 대전 후의 냉전적 상황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고, 일본은 다른 패전국이 받은 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 중국과 대만은 일본과 교역 물꼬를 트려고 경쟁하느라 전쟁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본 역시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했다.

책에 실린 사진과 학살의 사실적 묘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참혹하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실상을 알리는 것을 뛰어넘어 처참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본성과 아이러니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일본의 만행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추적하면서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종잇장처럼 얇은지, 권력이 얼마나 쉽게 10대 소년들의 천성을 변질시켜 살인 병기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드라마틱한 사람들의 인생 유전도 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다. 난징에서 중국인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중국의 오스카 쉰들러’ 욘 라베는 난징의 나치당 리더였다. 그는 독일에 돌아가 난징의 실상을 알리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됐고 전후에는 나치 전력 조사를 받으며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난징 대학살은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다. 저자가 책을 쓰는 동안 마음 깊이 새겨 두었다는 경고는 이 책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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