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동아연극상에 2억 기부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대표

  • 입력 2006년 4월 5일 03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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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하는 후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동아연극상 운영비로 2억 원을 기부한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대표. 배우이자 예술 경영자인 그는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기부하는 풍토가 정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연극하는 후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동아연극상 운영비로 2억 원을 기부한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대표. 배우이자 예술 경영자인 그는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기부하는 풍토가 정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올해 동아연극상 시상식장에도 어김없이 연극배우 유인촌(55) 씨의 모습이 보였다. 해외나 지방 출장으로 불가피했던 경우를 빼고 그는 십수 년째 동아연극상 시상식에 빠진 일이 없다.

2월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열린 제42회 시상식. 10년 만에 대상 수상작이 나온 올해는 유난히 하객이 많아 빈자리가 없었다. 그는 1시간이 넘는 시상식을 내내 선 채로 지켜봤다. “다리 아프실 텐데 의자 갖다드리겠다”고 권해도 그는 “연극할 땐 더 오래 서 있는데요, 뭘”하며 손을 내저었다. 오히려 북적대는 식장을 둘러보며 “올해는 ‘흥행’ 성공이야, 성공”하면서 신이 나 있었다.

한 달쯤 지나 그가 불쑥 전화를 걸어 왔다. 동아연극상을 위해 기부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3일 그는 동아일보사에 2억 원을 쾌척했다.

“동아연극상을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갖고 있었어요. 마침 신창건설에서 CF 섭외가 들어와 그 개런티를 내놓게 됐죠.”

공직(서울문화재단 대표)을 맡고 나서는 CF 출연을 자제해 온 그가 동아연극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선 것이었다.

“동아연극상은 연극배우에게 최고의 영예이지만 연극계로서도 정말 고마운 상입니다. 아무도 연극에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에 연극 발전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죠. 연극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의 마음과 함께 동아연극상이 계속 그 뜻을 이어나가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기부하게 됐어요.”

그는 “이번의 2억 원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동아연극상의 한 부문을 내가 평생 책임지고 후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동아일보사는 동아연극상의 개인상 부문 중 신인 배우들에게 주어지던 신인상의 명칭을 내년부터 ‘유인촌 신인연기상’으로 바꾸고 상금도 증액할 예정이다.

“연극배우의 삶은 십자가를 메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연극배우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동아연극상이 계속 해줬으면 합니다.”

그 역시 동아연극상 수상자다. 1996년, 그가 이끄는 극단 유의 창단작 ‘문제적 인간 연산’이 대상을, 1997년에는 ‘리어왕’으로 연기상을 수상했다.

“연극 경력에 비해서는 늦게 받은 편이었죠. 나한테는 상을 잘 안 주더라고.(웃음) 아마 나는 방송도 하고 그러니까 연극판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을 주자 싶었던 게죠. 그러다 마침내 동아연극상을 탔을 때 굉장히 기뻤어요. 방송에서 잘나갈 때도 무대를 잊지 않고 꾸준히 연극을 해 온 나를 인정해 준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그의 e메일 아이디는 ‘Hamlet2005’다. ‘햄릿’은 지난해 극단 유의 창단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그가 준비했던 작품이지만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햄릿’을 할 배우를 찾지 못해서다.

“‘햄릿’은 아무나 못해요. ‘햄릿’은 군인이자 철학자, 게다가 품위를 갖춘 왕자이기도 한, 수많은 인간이 녹아 있는 그런 복잡한 인물이죠. 이런 역을 하려면 연기 이전에 인생에 대한 사색이 있어야 하고 자기 생각이 정리돼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배우가 없어요. 연극을 할수록, 좋은 배우란 결국은 좋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느껴요. 자신의 그릇을 뛰어 넘는 연기는 나올 수 없거든요.”

덕분에(?) 연극 팬들은 ‘역대 최고의 햄릿’ 중 한 명으로 손꼽혀 온 그의 햄릿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그는 올가을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햄릿을 맡아 무대에 설 생각이다.

배우로서 그는 ‘타고난 햄릿’일지 모르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는 ‘햄릿’보다는 ‘돈키호테’에 가깝다.

적자가 뻔한데도 연극 불모지로 꼽히는 서울 강남에 극장(유씨어터)을 열었고, 강원 평창군 봉평의 한 폐교를 개조해 야외극장도 만들었다. 남들이 ‘쉽고 가벼운 연극’을 말할 때 그는 ‘어렵고 진지한 고전’을 고집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연극 대사이자 삶의 좌우명도 ‘돈키호테’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이룰 수 없는 꿈’ 대목이다. 그에게 그 대목을 청하자 울림 좋은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렸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고 해도, 물리칠 수 없는 적과 싸워야 해도,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참아야 해도….”

그는, 연극이라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인생 무대의 돈키호테였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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