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2년 의열단, 上海황푸탄 의거

  • 입력 2006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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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의열단(義烈團) 단장인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에게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 방문을 마치고 상하이(上海)에 올 것이라는 정보였다. 1919년 11월 결성된 의열단은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테러 등을 목표로 하는 항일 비밀결사단체였다.

단원들은 서로 “내가 해치우겠다”고 야단이었다. 그중에서도 김익상과 오성륜이 특히 적극적이었고 이종암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결국 3월 28일 상하이 황푸탄(黃浦灘) 부두 앞에 셋 모두가 권총과 폭탄을 품 안에 감춘 채 나타났다.

먼저 오성륜이 다나카를 알아보고 가슴을 향해 권총 두 발을 쏘았다. 그러나 다나카가 몸을 숙이는 바람에 옆에 있던 영국인 스네트 부인이 대신 총에 맞아 절명했다. 다음은 김익상이 나서 다나카의 뒤통수에 대고 권총을 쏘았다. 그러나 머리에 맞지 않고 모자에 구멍만 뚫렸다. 이어서 이종암은 다나카가 탄 자동차 앞바퀴에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불발이었다.

비록 다나카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상하이의 한국인 사회를 흥분시켰다. 독립신문은 “김, 오 양 의사가 다나카를 죽이고자 함은 오직 우리 민족의 공분(公憤)을 세계에 선포코저 하는 수단에 불과한지라. 사업은 성공을 목적함이나, 목적하다가 실패한 사업은 실로 그 가치가 동일하다 하노라”며 찬양했다.

더욱이 김익상은 체포돼 취조를 받던 중 그때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던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의 주인공이란 사실이 밝혀져 다시 한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김익상은 일본인 유학생,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총독부 건물에 들어가 폭탄을 던지고는 1주일 만에 상하이로 빠져나가는 신출귀몰한 솜씨를 보였다. 김익상은 이후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돼 재판을 받고 20년간 복역한 후 1942년 출소했지만 출옥 직후 일본 형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1926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설을 맞아 김 의사의 아내가 살고 있는 서울 이태원 집 탐방기사가 실렸다. 아내 송 씨는 홀로 어린 딸을 키우며 옥에 갇힌 남편을 그리워하는 한스러움을 절절히 토로했다.

“어느 해나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마는 설을 당하면…. 모진 목심으로 나 혼자 살면 무얼 해요. 아마도 생전에는 다시 만나 볼 것 같지 않아요. 어린 딸이나 알뜰히 키울랍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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