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9년 中-蘇국경 전바오섬 충돌

  • 입력 2006년 3월 2일 03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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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것은 인간사의 철리(哲理)다. 만남과 갈라섬의 정도나 범위가 상식과 예상을 깼을 때 뭇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할 뿐.

1969년 3월 2일 새벽 소련과 중국의 국경인 우수리 강 한가운데. 중국 측에서는 전바오(珍寶) 섬, 소련 측에서는 다민스키 섬으로 부르던 작은 섬에서 총성이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강 양편에서는 상대편을 향해 포탄과 총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31명, 소련 붉은 군대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날이 밝자 양쪽의 관영 언론매체가 십자포화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소련 반역집단은 미 제국주의 닉슨 행정부에 추파를 보냄으로써 연미반화(聯美反華·미국과 연맹하여 중국을 적대함)하기 위해 70여 명의 무장병력과 장갑차를 동원해 총과 포를 난사했다….” 중국 측의 발표였다. 소련 측에서는 중국이 도발을 저질렀다고 맞받았다.

“소련과 중국이 싸워?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비전문가들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지만 두 나라의 갈등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골이 깊었다. 1956년, 소련 20차 공산당대회에서 소련의 새 지도자 흐루쇼프(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공포정치를 비판하자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주석은 항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때만 해도 분쟁이 표면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계기는 흐루쇼프의 대미 화해정책이었다. 1959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만난 흐루쇼프는 중국에 대해 “미국과의 정면대결은 위험하니 대만 문제를 성급하게 해결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같은 해 중국에 약속했던 핵기술 이전을 거절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기 시작했고, 1963년 중국은 소련 핵심부를 사이비 수정주의 공산주의자로 지탄하기에 이르렀다.

막상 두 공산주의 강대국이 무력충돌을 일으키자 그 파장은 컸다. 중국에서는 2억5000만 명이 플래카드 시위에 나섰다. 3월 15일 소련군이 다시 대대적 공세를 펴자 세계는 ‘붉은 3차대전’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9월 11일, 호찌민(胡志明) 베트남 주석의 장례식에 참석한 코시긴 소련 총리는 베이징(北京)을 방문해 분쟁의 종식에 합의했다. 3년 뒤,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 주석을 만났다. 중국의 연미반소(聯美反蘇) 전략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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