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女優를 말하다]손숙이 본 ‘19 그리고 80’의 박정자

  • 입력 2006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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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모노드라마 ‘셜리 발렌타인’을 공연하면서, 그리고 그 공연을 끝내면서 내내 나는 이제 연극을 접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글쎄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먼저 나는 많이 지쳤고, 그리고 배우로서의 내 자존심에 많이 상처 받았기 때문일 거다. 연극 환경이 좋았던 적이 있었으랴만 모든 것이 발전하고 풍성해진 지금,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열악한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 연극 환경은 늘 내게 상처였고 아픔이었다.

1000만 명이 산다는 서울에서 100석, 200석짜리 소극장도 늘 관객 채우기에 급급해야 하는 현실, 10만 원이 넘는 대형 뮤지컬 공연에는 꽉꽉 들어차는 관객을 볼 때마다 느끼는 허탈감, 연습이나 공연에 바빠야 할 배우가 늘 표 팔 사람이 없나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너무 싫었고, 지쳤고,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이 연극판에서 사라지겠다고 혼자 결심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래서 내 공연이 끝나고 나는 가능한 한 연극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의 공연도 보지 않았고 심지어 가까운 연극인들도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자(사진) 형님이 연극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많이 망설였다. 그는 내게 형님 같은 분이고 내가 좋아하는 분이고 또 어려운 선배인데 이 일을 어째야 하나. 전에도 불쑥 “형님, 나 연극 안 할 거야”라고 투정하듯 말하면 “또 병 도졌구나”라고 피식 웃던 그 형님 공연을 안 갈 수는 없지,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이번 공연은 나로선 세 번째 보는 공연이니까 공연에 대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형님의 연기력이야 익히 아는 것이고. 그런데 공연 중간부터 나는 울기 시작했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 ‘모드(박정자)’ 할머니의 몸짓 한번과 표정 한번에도 계속 목이 메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거기 무대 위에는 내가 나이 들면서 늘 꿈꾸어 왔던, 내가 되고자 하는 할머니 한 분이 유쾌하게 사람을 웃기고 울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대로 자연이 되어 있는 모드, 모두 버려서 한없이 자유로운 모드,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늘 가슴이 뜨거운 모드가. 방황하고 정체성을 찾지 못해 애쓰는 ‘해롤드(윤태웅)’를 한없이 넓은 가슴으로 감싸 안는 사랑스러운 할머니 모드!!

“난 울지. 난 아름다움을 보고 울어. 낙조라든가 갈매기를 보고. 사람이 사람을 괴롭힐 때, 용서를 거절했을 때 난 울어.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 이 두 가지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야!”

이 대사를 하면서 조용히 울던 박정자 형님의 명연기에 나는 가슴이 뛰었고 눈물이 나왔고 나도 모르게 아낌없이 기립박수를 쳤다.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아, 배우란 위대한 거구나. 사랑을 잃고 가슴이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사람들을 울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배우로구나. “이거 보세요. 싸우고 다투고 마음이 아프고 사랑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 박정자 형님이 열연하고 있는 ‘19 그리고 80’을 보러 가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분장실에 들어가 땀에 젖은 형님을 꼭 안아 주고 극장을 나오면서 피식 웃었다. 갑자기 무대에 서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는 내가 우습고 기막혀서.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여배우 시리즈 공연으로 무대에 섰던 윤석화, 김성녀, 김지숙, 양희경, 박정자 그리고 나도 모두 귀하고 아름다운 여배우들이었단 생각도 들었다. <끝>

손숙·배우

:‘19 그리고 80’ 공연은:

19일까지. 화목금 7시 30분, 수 3시, 7시 30분, 토 3시, 7시 30분, 일 3시. 우림청담씨어터. 3만∼5만 원. 02-76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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