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기자 출신 소설가 은미희씨 첫 단편집 ‘만두…’ 펴내

  • 입력 2006년 1월 19일 03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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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새 없는 반듯한 얼굴에 간간이 떠오르는 조용한 웃음, 차분히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면 검은 눈동자의 눈빛이 따라서 반짝이는 것 같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광주 서구 금호동의 한 아파트에서 꼭 10년째 홀로 글쓰기를 계속해 오고 있는 여성 작가 은미희(45·사진) 씨의 외양은 그런 모습이다. 그는 1960년생, 1980년 대학에 입학해 ‘386 세대’의 첫 머리에서 반생을 살아왔다. 그가 이룸 출판사에서 최근 펴낸 첫 작품집 ‘만두 빚는 여자’에는 마흔을 훌쩍 넘어선 그 세대의, 폭이 넓고 깊어진 ‘포스트 386 인생관’이 담겨 있다.

은 씨에게는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이 처참하게 죽어간 뒤 대학병원의 영안실들을 찾아다닌 체험이 있다. 그는 배에 총을 맞아 숨진 뒤 거적에 덮여 있는 한 청년의 주검을 오래오래 쳐다봤다. “눈 감은 표정이 너무 편안하고,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얼굴을 한번 쓸어주면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만나 반갑다’고 손을 내밀 것 같더군요.”

은 씨는 하지만 이 경험을 소재로 쓴 소설 ‘도도를 찾아서’를 이번 작품집에 넣지 않았다. ‘좀 더 진전된 이야기를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 ‘진전된 이야기’는 ‘나이 든 386 세대’가 본 세상, ‘도식은 침묵하고 이율배반의 현실이 발언하는 세상’을 담고 있다.

대학 때부터 같이 붙어 다니던 친구들이 중년이 된 다음의 이야기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그런 세상의 단면이 나온다. 부의 분배와 자본가의 윤리를 이야기하던 친구들은 부동산 부자이던, 친구 종수의 아버지를 비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정작 등록금이 부족하거나 하숙비가 모자랄 때는 종수에게서 돈을 얻어 썼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종수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돈을 벌어 ‘계곡주’ ‘미인주’ ‘비아그라주’ 마시는 일로 밤을 소비하는 친구들은 어느 날 완전하게 몰락해버린 종수의 부음을 듣는다.

이번 작품집의 타이틀 작품인 ‘만두 빚는 여자’에는 장모가 될 사람이 치매에 걸린 것을 못 견뎌하는 남자에게서 버림 받은 여인 미례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가 떠나버리자 미례가 노모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모든 효심이 떠나버리는데, 그 싸늘한 광기와 은밀한 살의가 전율스럽게 묘사돼 있다. “누전되는 형광등 근처로 어머니가 손을 가져갔다. ‘제발 더, 조금만 더, 이제 지지직거릴 텐데….’”

은 씨는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했으며 삼성문학상을 받은 ‘비둘기집 사람들’ ‘소수의 사랑’ 등 2권의 사회성 강한 장편소설을 펴냈다. 은 씨는 방송사 성우와 신문기자 생활을 했었는데 근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주로 광주 산수도서관 열람실에서 소설을 썼어요. 때문에 컴퓨터 대신 육필로 주로 썼지요. 그러다 보니 나도 몰래 의식이 과잉될 여지가 있었어요. 2년 전부터는 집을 집필실로 삼고 있는데 적요한 집안에 앉아 있으면 어떨 땐 문학이 날 집어삼키는 것만 같아요.”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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