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용서 받지 못할 입…‘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 입력 2006년 1월 1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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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지음·김태희 옮김/1056쪽·3만9000원·교양인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스물여덟 살 때인 1925년 11월 아돌프 히틀러를 두 번째로 만나 그 카리스마에 완벽하게 굴복하고 만다. 그는 이날 일기에서 히틀러를 “왕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갖춘 타고난 호민관”이라고 썼다. 1945년 히틀러가 총통 벙커에서 자살한 지 하루 뒤인 5월 1일 괴벨스가 뒤따라 죽기까지 두 사람이 20년간 축성했던 독일 나치즘의 광기가 처음 번뜩인 것이다.》

괴벨스는 히틀러 제국의 선전장관으로 나치즘을 군중에게 전파하고 강제하는 데 전권을 행사했으며 결국 제국이 절정에 올랐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총력전 전권위원’이 됐다. 매스미디어의 정치적 위력에 일찌감치 눈을 뜬 그는 ‘국민 수신기’라 불린 76마르크짜리 라디오 보급을 독려하고, 대로와 광장에 ‘제국 스피커 기둥’들을 세웠으며, 히틀러를 독일제국의 성웅(聖雄)으로 만든 여성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의 후원자이자 라이벌, 갖가지 반(反)유대 영화 제작을 지휘했던 ‘정권 선전의 고수(高手)’였다.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라이트 시의 거리에 운집한 수십만 군중을 광기로 휘어잡은 천재적 선동가이기도 했다.

괴벨스가 남긴 8만 쪽의 일기를 편집했던 독일 저널리스트가 쓴 이 책은 네 살 때 골수염에 걸려 왜소한 체구로 성년이 된 한 독문학 박사가 어떻게 히틀러를 만나 독일인들을 악(惡)의 국가사회주의 속으로 빨려들게 했는지를 드라마틱한 점묘화처럼 써 내려간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괴벨스는 대학 시절 급진적인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든다. 실업과 가난에 짓눌리던 전후 독일에서 자신이 원하던 문필가의 길을 가지 못하고 은행에 취직해 생계를 이어 가면서 바이마르공화국에 대한 증오와 파시즘에 대한 공감을 키워 갔다. 특히 유대인 언론사의 취업에 실패하면서 이들에 대한 원한을 키워 가던 그는 히틀러의 뮌헨 쿠데타를 지켜보면서 자신과 독일 민족을 구원해 줄 구세주를 발견하게 된다.

독일군 상사 출신의 히틀러 주위에 몰려들었던 3류 선동가들 사이에서 문학적 수사를 화려하게 활용하던 이 야심가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으며, 깡마른 얼굴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아무도 그 앞에서 약삭빠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는 히틀러 못지않게 추앙받았으며, 작가 토마스 만은 절망한 나머지 그를 “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려는 지옥에서 온 입”이라고 비난했다.

괴벨스는 자신의 불멸의 작품으로 무오류의 신적 존재 ‘히틀러 총통 신화’를 만들었다. 그는 히틀러가 ‘섭리의 선택을 받은 초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모든 오류와 실패는 ‘총통을 잘못 모신 자들’의 잘못으로 돌아가게끔 했다.

그는 과격하다는 점에서 로베스피에르를, 교활하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를 닮았지만, 대중을 극적으로 휘어잡는 능력에선 비견할 사람이 없다. 그의 어록이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다음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두 믿게 된다” “복수에 목마른 적에게 맞서려면 한없는 증오를 활용해야 한다” “국민에게 불쾌한 뉴스를 무조건 숨기는 것은 심각한 실수다” “언론은 정부의 손안에 있는 피아노가 돼야 한다” “대중의 감성과 본능을 자극하라”….

괴벨스는 여배우와 어울린 그의 바람기에 시달렸던 부르주아 출신의 부인 마그다가 1남 5녀에게 독약 캡슐을 먹이고 동반자살한 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하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도 선전과 자기합리화의 ‘대가’답다.

‘우리는 살고 싸우는 법만 알았던 게 아니라 죽는 법도 알았다고 전해 주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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