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 입력 2005년 9월 24일 03시 12분


코멘트
◇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강덕상 지음·김동수 박수철 옮김/439쪽·1만8000원·역사비평사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關東)지방을 급습한 대지진은 인재(人災)였다. 점심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미처 불도 끄지 못한 채 거리로 뛰쳐나왔고 도시는 곧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들리는 땅, 타오르는 화염보다 “조선인이 방화하고 우물에 독약을 뿌렸다. 곧 조선인들이 대거 습격할 것”이라는 유언비어에 더 큰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마을마다 구성된 자경단은 ‘주고엔 고주고센(十五円 五十五錢)’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을 마구 처형했다. 산 채로 불에 태우고, 일본도로 목을 한번에 베는 경기도 하고, 여럿이서 톱질 한번, 찌르기 한번 등을 하는 집단살해를 통해 죄의식도 느끼지 않은 채 광란을 되풀이했다.

이렇게 9월 1일부터 5일까지 광란 속에 살해된 조선인은 6000여 명. 당시는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6만4000명의 육군병력과 경찰력, 관동 수역에 집결한 150척 함대의 해군력 등 일본제국이 총력을 다해 경계를 펴고 있던 바로 그때 대낮에 이민족에 대한 집단학살이 벌어졌다. 과연 일본 정부의 방조 없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재일교포 사학자인 저자는 1960년대부터 수집해온 일본정부의 비밀문서, 군사기록, 정부 고위관료의 수기, 일반시민 경찰 군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대학살의 현장을 다큐멘터리처럼 구성해냈다. 1975년 출간한 뒤 2003년 수정 보완한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번역했다.

저자는 유언비어의 근원지와 확산 주체, 조선인 학살의 주범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각종 군 관련 비밀문서를 통해 당시 유언비어를 메가폰이나 전령, 대자보를 이용해 대량생산한 것은 바로 관헌이었음을 밝혀낸다. 또한 계엄군대의 ‘공훈조서’와 군인들의 수기를 검토한 결과 군인들이 저지른 학살도 많았음이 밝혀졌다.

“모치즈키 상등병과 이와나미 소위는 재해지 경비 임무를 띠고 고마쓰가와에 가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아무런 저항도 없이 온순하게 복종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200명이나 참살했다. 부인들은 발을 잡아당겨 가랑이를 찢었으며 혹은 철사 줄로 목을 묶어 연못에 던져 넣었다.”(일본군 병사 ‘구보노 시게지(久保野茂次)의 일기’)

일본 권력층은 자칫 체제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는 민중의 굶주림과 공포를 ‘조선인에 대한 복수’로 돌렸다. 그리고 사건 이후에는 철저히 은폐했다.

강 씨는 “관동대학살은 식민지 지배과정에서 일본 지배계급은 물론 민중에게까지 침투됐던 ‘만만치 않은 적’인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심이 밑바탕에 깔린 집단 살인이자 민족 범죄였다”며 “이 사건은 아직도 일본사회가 한국인에 대해 차별과 편견을 갖고 있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