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친절한(?) 여고생…‘세상의 친절’

  • 입력 2005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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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친절/이남희 지음/324쪽·9000원·문이당

이남희(47·사진) 씨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들어가 볼 수 있어 작가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여고생 최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제 너는 자유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고 말한다. 최유리는 이 소설에서 이 씨가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녀는 아주 위악적인 얼굴로 이 씨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잖아도 밤거리를 배회하는 습관이 있는 유리는 문예반 지도교사 김승재의 뒤를 쫓아 사창가까지 따라간다. 며칠 후 그가 작문 숙제를 내주자 최유리는 사창가에서 본 일을 아주 소상하게 써낸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여자의 몸매를 훑는다. 백설처럼 하얀 허벅지에 검붉은 문신이 두드러져 보인다.”

열여덟 살 최유리는 순진하기 때문에 도리어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똑바로 아는 소녀다. 사랑은 이렇게 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다. 최유리는 그저 ‘손끝만 닿아도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김승재를 좋아하는데 정말 감전되고 싶어 그를 스토킹한다.

그러나 김승재는 영화 속 브래드 피트나 키아누 리브스처럼 근사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정신 속에는 가식적이며 매몰찬 할머니로부터 학대 받는 어린 소년 김승재와 성적 폭력에 시달리던 학생 김승재,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살의를 갖게 된 괴물 김승재가 동거하고 있다. 그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다중인격자인 것이다.

비정규직과 실업에 시달려 온 김승재에게 세상은 ‘사기꾼이여, 내 동포여, 내 형제여’라는 보들레르의 시구가 절로 입에서 나오게 만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다. 가정 역시 낙원의 거죽을 한 지옥이다. 차라리 김승재는 자기에게 가혹한 폭행을 일삼다 숨진 할머니의 가식적인 보살핌에 향수마저 느낄 정도다.

이 소설은 최유리가 김승재라는 인간 내면의 골짜기와 늪과 황무지를 거쳐 성(性)과 사랑, 세상과 삶의 진정성을 향해 가는 정신적 모험의 여정을 담으려 했다. 두 사람은 가장 간극을 좁혔을 무렵 브레히트의 시 ‘세상의 친절’을 함께 읽는다. ‘차가운 바람 가득한 이 세상에/너희는 발가벗은 아이로 태어났다’고 시작하는 시다. ‘차가운 바람 가득한 이 세상을/너흰 온통 딱지와 흠집에 뒤덮여 떠나간다/두 줌의 흙이 던져질 때는/거의 누구나 이 세상을 사랑했었다’로 끝난다.

훨씬 감상적으로 써도 좋을 이야기지만 이 씨의 리얼리즘이 그걸 제지하고 간섭하는 게 보인다. 김승재에게 공포를 가르쳐준 세상의 비정함을 설명하는 대목은 지루하다. 하지만 여교사가 음침한 남학생들한테 농락당하면서 거칠어지는 과정을 털어놓는 대목은 생생하다. 이 소설에는 성에 대한 최유리 또래의 호기심과 학교에서의 성 문제가 이어지는데 그 대목들이 모두 현실감으로 차 있다.

그 음습하고 후덥지근한 세월을 거쳐 간 최유리는 어떻게 됐을까? 이 씨가 작가의 말 끝에 인용해 놓은 랭보의 시를 혼자 읽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 같은 것은 없다. 새로운 시간이란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엄정한 것이다…기도는 질주하고, 송가는 울려 퍼진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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