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천재공장’… 골라만든 천재들 잘 살고 있나

  • 입력 2005년 7월 2일 03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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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후손 선택을 위한 저장고’란 말 들어본 적이 있니?”

“없어요.”

“네가 아빠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는 말 내가 자주 하는 거 알지? 넌 아빠보다 잠재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너는 네 아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아!”

“…….”

“엄마는 오랫동안 임신이 되지 않았어. 의사가 캘리포니아의 정자은행을 소개하더구나. 정자 기증자가 모두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어. 톰, 넌 거기서 나왔단다. 네 진짜 아버지는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야!”》

카메라 앞에 서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천재 정자은행’의 설립자 로버트 그레이엄 씨. 그는 노벨상 수상자 등에게서 기증받은 정자를 지하 벙커의 액체질소 탱크에 냉동보관했다. 사진 제공 북@북스

◇천재공장/데이비드 플로츠 지음·이경식 옮김/420쪽·1만2000원·북@북스

미국 역사상 가장 기괴한 인간품종실험이었던 ‘노벨상 정자은행’.

1980년 이 천재 정자은행을 설립한 억만장자 로버트 그레이엄 씨는 이렇게 홍보했다. “노벨상 수상자의 정자를 기증받아 ‘멘사’(IQ 160 이상인 사람들의 모임)의 여성 회원들에게 제공한다.”

저자는 이 정자은행이 1999년 문을 닫을 때까지 19년 동안 탄생시킨 217명의 아이 가운데 30명의 삶을 추적한다.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정자 기증자는 누구일까, 실제로 노벨상 수상자의 아이들이 세상에 퍼져가고 있을까?

2001년부터 4년간 인터넷 잡지 ‘슬레이트’에 연재됐던 르포는 소설 형식으로 생생하게 재구성된다.

그레이엄 씨가 정자은행을 세운 것은 하류 인생들이 똑똑한 소수를 수적으로 압도하는 현실을 더는 방치할 수 없어서였다. 그는 뉴턴이나 워싱턴에게 후손이 없다는 사실, 링컨의 가계가 끊긴 사실이 몹시 안타까웠다. ‘자연선택’이 아니라 ‘지능선택’을 통해 진화의 수레바퀴를 돌리고자 했다.

사람들은 처음엔 천재 정자은행을 반신반의했으나 마침내 정자를 제공했다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타나자 열광했다.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였다.

그를 포함해 정자를 제공한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세 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정자를 제공받은 여성들은 모두 임신에 실패했다. 석학들의 정자가 너무 노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엄 씨에게는 컴퓨터 과학자이자 고전음악가의 정자에서 태어난 도론이 있었다.

1982년 이 정자은행의 두 번째 아기로 태어난 도론은 IQ 180의 천재였다. 유치원에 다닐 때 이미 ‘일리아드’를 읽었던 도론. 그는 회사의 마스코트이자 스타였다.

천재 소년의 이야기에 여자들은 황홀해했고 정자를 제공받으려고 줄을 섰다.

‘우생학적 십자군전쟁’에 몸을 던졌던 그레이엄 씨. 그는 말년엔 원칙 없이 기증자를 받아들였다. 연령제한을 두지 않아 60세가 넘는 기증자도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한 기증자의 정자에선 50명이 넘는 아이가 태어났다. 근친상간의 위험이 있는 수치다.

이곳을 비롯한 수많은 정자은행을 통해 태어난 미국인은 현재 100만 명을 헤아린다. 이 수는 해마다 3만 명씩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자신의 출생의 비밀, 유전자의 역사를 모른다.

언젠가는 정자 기증자에 대한 익명의 원칙은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정자 아버지’를 알 권리가 반드시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얼굴도 모르는 진짜 아버지가 따로 있으며, 그는 단지 자위행위를 통해 정액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 아이의 심정은 어떨까. 같은 아버지의 정자에서 태어났으나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복형제는?

기증받은 정자로 임신이 되자 악몽에 시달리는 여성도 있다. ‘대체 내 몸 안에 있는 게 누구지?’

마치 한편의 SF영화처럼 읽히는 이 책에서 저자가 묻고 있는 것은 가족의 의미다.

톰은 진짜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도, 천재도 아니었다. 존경할 만한 구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위인이었다. 톰은 유전자의 운명을 부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톰은 길러준 아버지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지금의 아버지와 피를 나누지 않은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게 단지 혈연의 문제일까요? 가족의 울타리에 누가 따뜻한 손길을 내미느냐, 이게 중요한 거죠….”

원제 ‘The Genius Factory’(2005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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