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을 전후한 ‘순국 1호’인 이 열사는 1901년 영국 런던에 주영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부임해 1904년 서리공사에 임명됐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의 한국 지배가 시작되고 이듬해 영국마저 일본과 동맹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자 1905년 5월 31세의 나이로 영국에서 자결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의해 자결한 민영환(閔泳煥) 선생보다 6개월 앞서였다.
이 열사는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의 평등이 없어졌으니,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진실로 혈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참고 견디리오”라는 유서를 남겼다.
구대열(具대列) 이화여대 교수는 ‘국은 이한응 선생의 외교활동’이라는 추모강연에서 “국은 선생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 세력의 지배 아래 놓일 것을 통찰하고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했다”며 “이 제안은 당시 동아시아 세력 균형을 범세계적 차원의 세력 균형과 연계시킨 탁월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추모식에는 이 열사의 손자인 이민섭(李珉燮) 동국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추모사업회장인 이홍구(李洪九) 전 국무총리, 이태식(李泰植) 외교통상부 차관, 이인호(李仁浩) 전 러시아대사, 문정희(文貞姬) 동국대 석좌교수 등이 참석했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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