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역사하고 놀자’

  • 입력 2005년 3월 23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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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가을 조선시대 사대부가(家)의 연애담을 다룬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란 영화가 히트한 적이 있다. 배용준이 수절하려는 전도연을 무너뜨리려다 사랑의 덫에 걸리는 바람둥이로 나오는데, 기자에게는 그 내용보다 형식미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여인들의 단아한 자태, 영롱한 빛깔의 장신구, 몸을 감싸는 한복의 맵시, 사대부들의 풍류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생활상을 참 밝고 화려하게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자의 상식이 모자라 그런 인상을 받았겠지만, 사실 한국에서 많은 이의 역사 배우기는 대학입시로 끝난다. 그것도 시험용이어서 몇 개의 보기 중 하나를 맞히는 ‘단답형’의 기억으로 분절될 뿐이다. 그러니 고구려인의 기백, 개혁 군주 정조의 고뇌, 근대를 지향한 실학파의 열정 등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E H 카가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말에 비추면, 단답형의 기억은 역사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현재와 대화를 하지 않는 과거의 사실은 역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의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 ‘올빼미의 성’, ‘막말의 암살자들’을 잇달아 읽었다. 재미 때문에 읽기 시작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막부, 메이지유신까지 사무라이 닌자 쇼군의 얼굴이 떠오르고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요즘 사무라이의 칼을 휘두르려는 일본 우익의 유전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품이 많다.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해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은 풍성한 해석으로 당시 인물들과 소통하게 해 준다.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다룬 김훈의 ‘칼의 노래’나 실학자 정약전의 유배생활을 다룬 한승원의 ‘흑산도 하늘길’을 통해서도 선인(先人)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대장금’, ‘해신’ 등 한 시대를 다룬 드라마도 이런 대화의 채널이다.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이런 작품들은 선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를 통해 우리 앞에 나타난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면서 우리의 현재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준다.

고구려사를 노리는 중국, 독도 영유권 망언을 끊임없이 쏟아 내는 일본에 대응하는 방법은 ‘단답형 분노’의 표출을 넘어서야 한다. 고구려인이 어떻게 살았고 그 삶이 우리에게 어떤 유전자로 대물림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고구려인과 우리가 일체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독도 사랑’도 역사부터 챙기자.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단답형 외침 외에 독도에 얽힌 옛 사람과 이야기를 얼마나 아는가. 신라 장군 이사부에 얽힌 전설, 3대에 걸쳐 독도를 지킨 홍재현 일가, 일본 순시선과 전투를 벌인 독도의용수비대 등 이야기가 많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많이 하면 할수록 독도는 더 가까이 우리 곁에 살아 숨쉴 것이다.

역사를 되살리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심포지엄 전시회 소설 영화 드라마 등 어떤 형태로든 역사하고 놀아 보자. 그것이 역사 분쟁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재를 다지는 길이다. 단답형의 기억은 오래가지 못한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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