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희]‘夢陽 이벤트’의 끝

  • 입력 2005년 3월 9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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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선생에 대한 서훈 문제가 끝내 씁쓸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다. 지난해 8월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으로 시작된 ‘좌익계열 독립운동자 서훈’ 문제는 반년여의 논란 끝에 서훈 쪽으로 정리됐지만 몽양 선생의 직계 가족이 그 훈장의 수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몽양의 유일한 생존 자녀로 북한에 거주하는 딸 원구(鴛九·77) 씨가 7일 밝힌 거부의 변은 크게 두 가지다. “남조선 당국은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 계열이니 친북 계열이니 하고 편을 가르며…이념논쟁 마당을 펴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오늘도 남조선에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미군이 활개치고 그들이 저지른 살인 만행의 진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전자의 이유만이라면 그래도 ‘정서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좌익계열이라는 이유로 상당히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쳤고 결과도 건국훈장 1등급이 아닌 2등급이기 때문이다. 몽양의 가족으로선 그 대목이 섭섭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이유에 이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미군 철수 문제까지 서훈과 연결시킨 것은 남한 정부의 어떤 포상도 받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예 남한 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대목에 남북 간 소통의 문제가 있다. 남쪽에선 내부의 갈등과 우여곡절을 거쳐 이 정도나마 ‘비주류 기억의 복권’으로 나아갔지만, 북쪽으로선 그런 진척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몽양 서훈’을 두고 남북이 각각 사용하는 언어에도 전혀 공통분모가 없다. 조정과 타협보다는 거부의 제스처가 비수로 되돌아오는 게 남북 관계의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원구 씨의 반응으로 가장 머쓱해진 것은 사실은 남한 정부다. 당초 몽양 선생의 서훈 신청자는 남한에 거주하는 조카였고, 훈장도 그가 수령하면 될 일이었다.

몽양 선생에 대한 서훈 방침이 굳어져 가는 과정에서 “이왕이면 북한의 직손(直孫)에게 수여하면 남북 화해에 모종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벤트 안’이 정부 일각에서 제시되면서 급격히 원구 씨가 부각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화해의 이벤트는 백일몽일 뿐이었다. 만약 북한 체제의 고위직에 있는 원구 씨가 남한 정부의 서훈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사고였다. 우리 정부가 북한 정권의 수립에 기여한 사람을 서훈할 수 없듯 원구 씨 역시 부친에 대한 남한 정부의 서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닐까.

편의주의 혹은 한건주의 사고의 결과인가. 이제 몽양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대통령장은 언제 수여될 수 있으리란 기약도 없이 보훈처의 창고에 처박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남북 화해는 차치하고 애써 만들어 낸 몽양과 한국사의 화해부터 빛이 바랜 셈이다.

비좁은 해방공간에서 어렵사리 좌우합작을 시도하다 끝내 파탄으로 막을 내린 몽양 자신의 운명이 오늘날 남북 간 경색 국면의 선행지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김창희 국제부장 ins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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