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국립현대미술관 한국화 수복전문가 차병갑 씨

  • 입력 2005년 1월 27일 15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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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초 이유태 작 ‘화음’(1944년)의 일부. 여기저기 얼룩이 남아 있던 모습(사진 위)과 보존 처리 뒤 깨끗한 피부를 되찾은 미인의 얼굴.
현초 이유태 작 ‘화음’(1944년)의 일부. 여기저기 얼룩이 남아 있던 모습(사진 위)과 보존 처리 뒤 깨끗한 피부를 되찾은 미인의 얼굴.
20일 오후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화 보존실.

그림과 한지가 가득한 20평 남짓한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중앙에는 소송 김정현(小松 金正炫·1916∼1976) 화백의 ‘임도(林道·1972년 작)’가 걸려 있다.

김정현은 문기(文氣) 짙은 남화의 전통을 계승한 작가. 화면 가득히 서 있는 미루나무 사이로 둥근 달이 보이는데 곳곳에 얼룩처럼 보이는 황색 반점이 보인다. 작품의 표면 노화가 진행되면서 습기로 인해 생긴 반점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작품을 바라보던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 차병갑 씨(52)는 “그림이 아프다”고 말했다.

○ 아픈 그림을 치료하다

차 씨는 40년 가깝게 한국화의 보존 처리를 담당해 온 한국화 수복전문가. 현재까지 1500여 점의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국립현대미술관 한국화 수복전문가인 차병갑 씨가 김정현 화백의 작품 ‘임도’를 보존처리하고 있다. 강병기 기자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남자 주인공 준세이의 직업 미술품 복원사를 떠올리기 쉽지만 수복전문가는 조금 다르다.

“복원사는 그림을 원상태로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는 반면 수복전문가는 보존 처리에 중점을 둬 작품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수복 과정은 크게 상태 조사→수복 방침 결정→클리닝→손상 부분 보강→배접(작품에 종이를 덧붙여 보호해 주는 것) 등으로 이어진다. 보통 보름 안팎의 시간이 걸린다.

다행히 ‘임도’는 크게 손상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간단한 습식 클리닝과 배접을 하기로 했다. 손상이 심각한 경우 적외선과 X선, 현미경 촬영을 하기도 한다.

한국화 수복은 작품의 재료가 되는 종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종이는 천년, 비단은 오백년을 간다는 ‘지천년 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는 말이 있죠. 좋은 종이와 풀, 기술이 결합되면 한지에 그린 작품은 능히 천년을 갈 수 있습니다.”

종이만 만져도 어느 공방에서 나온 것인지를 짐작한다는 그는 작품 뒤에 붙은 배접지를 능숙하게 분리했다. 이어 작품에 새로운 배접지를 놓고 물을 분사한 뒤 정성스럽게 붓질을 했다. 다시 배접지를 조심스럽게 떼어내자 놀랍게도 황색 반점이 사라져 있다.

○ 한문 배우고 싶어 인사동으로

그가 한국화 수복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8년 인사동에서 표구 일을 배운 것이 계기가 됐다. 전남 화순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졸업 뒤 16세 때 광주의 나전칠기 공예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손에 옻이 옮아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공예사에서 도망쳤습니다. 서울에 있던 동네 선배가 돈 벌면서 글씨랑 그림이랑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죠. 바로 인사동이었습니다.”

도제식으로 배운 그의 솜씨는 ‘죽은 그림도 살려낸다’는 명성으로 이어졌고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에 특채됐다. 1990년부터 뒤늦게 학업을 시작해 검정고시를 거쳐 방송통신대를 졸업하기도 했다.

수복 과정에는 에피소드도 많다. 1992년 미인화로 유명한 목불 장운상(木佛 張雲詳·1926∼1982)의 ‘9월’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급한 연락이 왔다.

“유두가 없어졌어요. 유두가….”

가슴이 노출된 작품인데 짓궂은 관람객이 손으로 눌렀는지 왼쪽 유두가 사라진 것. 밤샘 작업으로 패인 부위를 살려 유두를 만들었다. 며칠 뒤 “차 선생님 또…”라며 직원의 숨넘어가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오른쪽이었다.

“며칠 사이에 한 작품을 두 번 수복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1997년에는 충남 아산 현충사의 충무공 영정을 수복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폭발물이 설치됐다는 첩보에 따라 조사를 벌이다 영정 아래 부분이 찢긴 것. 영정을 외부로 유출할 수 없다는 방침에 따라 ‘충무공과 함께 숙식을 하면서’ 수복 작업을 했다.

○ 늙었으면 주름도 있어야지

그는 인터뷰 뒤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벽에 걸린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까 음식점에 그림이 있었죠. 그거 단물이 빠진 그림입니다. 예를 들어 여인의 피부는 뽀얀 빛깔이면서도 약간의 붉은 기운이 있어야 하고, 사람은 나이가 들면 연륜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데 거기 그림은 50년 정도 된 작품인데 너무 깨끗해요. 미술품은 세월에 맞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보존처리는 무조건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나이에 어울리게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쪽 일을 하면서 고미술품 매매로 큰 돈을 번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나는 미술품을 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림장사로 돌아서면 사람이 변합니다. 내 손을 통해 작품이 되살아나는 순간, 그 희열을 다른 사람들은 상상 못합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집안 미술품은 환기 잘되게 유리액자는 가급적 삼가야▼

집안에 있는 미술품을 어떻게 관리할까.

차병갑 씨는 “한마디로 미술품은 소장가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산다”고 말했다. 그림과 족자 등 종이로 된 미술품의 보관 장소는 온도는 20도, 습도는 50% 내외로 유지되는 게 좋다. 즉, 습하지 않고 환기가 잘되는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

또 작품을 만질 때는 우선 꼭 장갑을 껴야 한다. 손의 지문과 소금기가 작품을 훼손할 수 있다. 작품 앞에서 대화를 나눌 때는 거리를 두거나 마스크를 착용하는 게 좋다. 침이 튀어 큰 얼룩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열 손상을 피하기 위해 간접조명을 사용하고, 먼지를 제거할 때는 부드러운 솔을 사용한다.

벽에 걸린 작품을 다른 것으로 교체할 때는 주변의 먼지를 제거한 뒤 보관해야 한다. 창고 등에 보관하는 작품은 반드시 벽과 거리를 띄운다. 벽의 곰팡이가 작품으로 옮아가기 쉽다. 유리 보관은 작품이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피하는 게 좋다.

일단 작품에 얼룩이 생기는 등 손상이 심해지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특히 고미술품은 작은 흠집도 큰 손상으로 이어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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