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가난한 옹기장수의 6남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따뜻한 밥을 제때 먹을 수 있는 장사꾼을 꿈꾸던 유년시절부터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된 뒤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물러나기까지 그의 삶과 신앙을 오롯이 담았다. 격랑의 현대사 속에서 묵묵히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근엄한 모습 뒤의 우리가 잘 모르던 인간적 모습도 담겼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일본 조치(上智)대에서 유학하던 1944년 김 추기경은 일제의 협박과 강요 속에 학병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그의 영적 스승 게페르트 신부는 김 추기경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도를 하다 흐느껴 울었다. 이때 김 추기경은 스승의 진한 사랑을 느꼈다.
1951년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는 그를 사모하던 한 여인으로부터 “나를 받아줄 수 있겠어요”라는 청혼을 받고 갈등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피가 끓는 젊은이였다.
천주교계에서 화려하게 성장해간 그였지만 52년의 성직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2년 반 동안의 본당 신부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1974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체포된 지학순 주교를 석방시켰고, 1980년 정월 초하루에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고 꼬집었듯이, 그는 권력에 대해서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외국에서 극적으로 역전승하는 방송을 새벽까지 보고 난 뒤 흘러나온 애국가를 눈물을 흘리면서 따라 부른 것도, 모자를 눌러 쓴 채 등산을 가서 “추기경을 많이 닮으셨네요”라는 등산객들의 질문에 “저도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고 대답한 것도 바로 김 추기경 자신이었다.
“나는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무척 좋아한다. 산등성이로 석양이 기우는 풍경은 내 고향이고 내 어머니이다”로 책을 시작한 김 추기경은 “인생을 하루에 비유하면 난 지금 해거름에 와 있다. 정상에서 내려와 황혼 들녘에 서 있는 기분이다”로 맺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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