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국자 이야기’…‘生의 구멍’ 들여다보니…

  • 입력 2004년 12월 10일 17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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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조경란 지음/296쪽·8800원·문학동네

가족과 현실로부터 소외된 미혼 독신 여성의 의식 세계를 섬세한 감각과 문체로 그려 온 조경란의 네 번째 창작집이다.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보기’라는 것도 일종의 욕망으로 친다면 조경란 소설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은 바로 그것이다.”(손정수·문학평론가)

세계로부터, 인간으로부터 ‘나’를 고립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자폐적 의식을 서술하는 것은 당연히 ‘고백’이 될 수밖에 없을 터. 이 소설집에는 1996년 ‘불란서 안경점’으로 등단한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장편소설이나 창작집을 묶어 내 문단 내에서도 부지런한 작가로 알려진 그녀가 최근 들어 쏟아 낸 자전적인 단편소설들이 담겨 있다.

아예 ‘나’를 제목으로 앞세운 1인칭 소설 ‘나는 봉천동에 산다’나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 같은 작품들에는 흔들림 없는 잔잔한 물결 아래 소용돌이치는 거센 내면세계가 담겨 있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것은 두렵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는 데서 원초적 비극이 숨어 있는 법. ‘나는 봉천동에 산다’에 소개된 아버지의 말을 통해 작가는 ‘글쓰기’라는 운명을 비켜갈 수 없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가족과 현실로부터 소외된 미혼 독신 여성의 의식세계를 섬세한 감각과 문체로 그려 온 조경란. 이번 소설집에는 1인칭과 3인칭 소설들을 번갈아 선보이며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보기’를 시도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봉천의 하늘 한가운데로 휘영청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키가 큰 아버지가 한번 껑충 뛰어오르면 정수리에 달이 닿을 것만 같았다…저 달을 들어내면 하늘에 구멍이 남질 않겠냐. 너는 작가가 아니냐. 모든 사람의 생에는 구멍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느니라. 그 구멍을 오래 들여다 보거라.’

이 ‘구멍’이라는 단어는 작가가 왜 줄곧 인간 내면에 숨겨진 고독의 원형질을 탐사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번 소설집에는 또 ‘타인’을 통해 ‘나’를 이야기하는 3인칭 소설 ‘좁은 문’과 ‘입술’도 선보인다.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좁은 문’은 전당포 남자와 카페 여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통의 부재 혹은 ‘관계의 틈’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들은 틈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메우려는 시도는 한 쪽의 일방적인 감정의 노출로 귀결될 수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틈을 없애는 게 아니라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다. ‘타인’의 입을 통해 작가의 내면에 도달한 고독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표제작 ‘국자 이야기’는 심리적 균형에 관한 이야기다. 30년 가까이 낡은 국자만 사용해 온 주인공 중국음식 요리사의 강박적 반복을 통해 ‘뭔가 꾹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을 한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일상의 사소한 리듬’을 유지하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한다.

그녀의 소설은 마치 롱 테이크 기법으로 찍은 느린 영화를 보는 듯하다. 순간적인 상황 묘사나 심리 묘사에 치중해 자신만의 미학적 문체를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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