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오름 오르다’…시골 주모같은 푸근함

  • 입력 2004년 12월 10일 17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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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오르다/이성복 지음 고남수 사진/248쪽·9500원·현대문학

이성복 시인이 ‘오름(제주도의 기생화산을 일컫는 제주 방언)’을 주제로 펴낸 사진 에세이다.

저자는 2년 전 제주도 오름을 주제로 사진을 찍어 온 사진작가 고남수 씨와의 인연으로 ‘오름 여행’을 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고 씨가 찍은 오름 사진 24컷이 실렸다. 저자는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오름을 언어라는 이질적 렌즈로 재분해하고 재구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고 밝혔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일찍이 ‘내면의 상처’라는 추상을 ‘시’라는 구체적 미학으로 보여 온 그에게 오름은 반대로 구체적 물상을 통해 내면을 인화해가는 도구였다. 오름은 용암이 굳어져 내린 산이다. 그래서 산세가 완만하고 단순하다. 그동안 풍경 묘사든 내적 성찰에 기초한 잠언이든 한결같이 상처 입은 것들을 껴안고 핥아 온 시인에게 오름의 선이 주는 부드러움과 완곡함은 연민과 치유의 이미지였다.

‘오름의 선은 화면의 그 아래 공간에서 서서히 융기하다 잠시 멎은 듯한 느낌을 주고, 그 때문에 오름 위의 잿빛 하늘은 기세 눌려 다소 숨이 답답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 화면에 머무는 잿빛 평화가 다소 탱글탱글한 공의 내부처럼 느껴지는 것도 오름의 둥근 선뿐만 아니라 그 선의 조용하고 꾸준한 상승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둥근 선은 밝은 면으로부터 어두운 면으로 내려 깔리고, 어두운 면은 밝은 면과의 대비를 통해 부피와 무게를 얻는다.… 요컨대 저 혼자 어두울 수는 없는 것이며, 저 혼자만으로는 선도 면도 부피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물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오름이 시인에게 여성적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관능적인 젊은 여자가 아니라 ‘붕긋한 배와 처진 가슴을 드러내 놓고 잠자는 중년 여인’이다. 시인은 이 시점에서 문득 20여 년 전 진주에서 해남 가는 길 벌교 막걸리집 골방에서 만난 주모를 생각한다.

‘지금쯤 환갑을 밑돌 그 여자의 배와 가슴도 화면 속 오름처럼 여러 겹 주름이 졌으리라. 하지만 지금 퍼져 누운 여인의 몸집 위로 땅거미처럼 다가오는 느낌은 여러 겹 주름보다 먼저 있었다. 몸집이 크고 살집 많은 것들이 보여주는 슬픔은 그것들의 부푼 살덩어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저도 몰래 살덩어리가 만드는 곡선, 아무도 달랠 수 없고 저도 어쩌지 못하는 하염없는 곡선에 있다.’

숨겨진 부분, 가려진 부분을 보는 제3의 눈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라는 점을 되새긴다면 이성복의 언어를 통해 세상의 가려진 부분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자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이다. 차가운 기계(카메라)의 눈으로는 결코 읽을 수 없는 그의 언어는 새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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