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화전’… 근대회화사 200년, 역사와 화가의 만남

  • 입력 2004년 12월 10일 17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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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화가 채용신이 그린 의병장 ‘최익현’(국립중앙박물관소장). 선비 최익현이 74세의 나이로 항일의병운동을 이끌던 당시를 그린 것이다. 일본에 대한 단호한 저항 의식과 함께 자기 힘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어쩔 수 없다는 절망감이 얼굴 표정에 배어 있다. -사진제공 청년사
1905년 화가 채용신이 그린 의병장 ‘최익현’(국립중앙박물관소장). 선비 최익현이 74세의 나이로 항일의병운동을 이끌던 당시를 그린 것이다. 일본에 대한 단호한 저항 의식과 함께 자기 힘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어쩔 수 없다는 절망감이 얼굴 표정에 배어 있다. -사진제공 청년사
◇화전(畵傳)/최열 지음/462쪽·2만4000원·청년사

제목 ‘화전(畵傳)’은 ‘화가열전(畵家列傳)’, 혹은 ‘화가전기(畵家傳記)’의 줄임말이다. 갤러리 가나아트센터의 큐레이터인 저자가 19, 20세기를 살았던 화가 28명을 다룬 평전이다. 그동안 화가들의 생을 다룬 평전들이 많이 나왔지만 10여 년에 걸친 자료 수집이라는 공력이 대변하듯 꼼꼼하고 정밀한 책이어서 눈길이 간다.

이 책의 특징은 우선 우리나라 ‘근대’ 200년의 회화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를 살았던 화가들의 삶과 작품 활동을 중심으로 근대 미술사를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화단에서 근대 화가와 작품 연구가 미비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역사적 과도기로서 전환과 변혁으로 생동하던 이 시기 화가들에 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참신하다.

우리의 근대(18세기 후반∼20세기 초반)는 격정과 파란의 시대였다. 당연히 이 시대를 다룬 그림 역시 역사를 보는 시선과 동떨어질 수 없다. 저자가 끊임없이 그림과 화가와 역사를 교직시키는 시선을 유지한 점이 이 책의 두 번째 특징이다. 회화에 대한 전문지식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합쳐진 입체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예로 든 화가 채용신이 1905년에 그린 ‘최익현 상’을 보자. 본래 선비는 털모자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그림의 최익현은 털모자를 쓰고 있다. 왜일까?

최익현은 당시 책 읽는 선비가 아니라 74세의 나이로 항일의병운동을 이끌었던 의병장이었다. 화가는 친일파를 규탄하고 일제 침략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됐던 의병장 최익현을 그린 것이다. 최익현은 일제가 주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버티다 굶어 죽었다. 눈동자에 어린 이글거리는 분노와 자기 힘으로는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절망이 섞인 이 그림은 그 자체가 역사를 고증하는 증거물이다.

이 같은 저자의 전문성은 묻히고 잊혀진 화백들을 조명하는, 즉 아웃사이더를 보는 따뜻한 시선에서 제대로 빛을 발한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우봉 조희룡이나, 사후 100년이 지난 뒤에야 주목받았지만 아직 본격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홍세섭,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았고 친일파 등과 교류했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던 이도영 등이 저자의 따뜻한 시선에 의해 복권되거나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저자는 책 갈피갈피에 현재 화단을 보는 안타까운 시선도 곁들였다. ‘연구도 하지 않고 주장만 하는 습관이 널리 퍼져 있는 게 조선 미술을 공부하는 사학의 현실’이라거나 ‘미술사학의 현실은 학파를 가릴 것도 없이 장님들로 넘쳐나고 있다’는 지적 등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통해 산 사람의 할 일을 지적하는 일처럼 보인다.

오랜 시간, 세상을 떠나 버린 이들을 찾아 헤맨 연유를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화가를 만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산 사람보다 떠나 버린 사람들을 만날 때가 마음이 편했다. 텅 빈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론 힘겹게, 때론 가볍게, 마음 내키는 대로 그 빈 터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기록했다. 허깨비 놀음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 때마다 죽은 자들이 남긴 그림 속에서 그들의 영혼과 만나고 그들의 혼과 이야기하면서 충만감을 얻었다. 이 책은 그 충만함의 기록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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