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巨匠이 사라진 시대

  • 입력 2004년 12월 7일 18시 25분


코멘트
한국 가정에서 가장(家長)의 시대가 지고 있듯, 한국 사회에서 거장(巨匠)의 시대 또한 가고 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바위처럼 버티고 있던 거물(巨物)의 시대는 가고, 고만고만한 씨족장(氏族長) 수준의 중간 보스들만 오가고 있는 세태다.

뛰어난 실력과 넘치는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하던 거물들은 온데간데없고, 선배들의 업적과 그릇은 뛰어넘지 못하면서 그들을 깎아내리고 짓밟으려 드는 소인배(小人輩)들로만 가득한 세상이다. 후학들은 어른을 모시기는커녕 어른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른다.

한국 정치의 지난 30여 년을 좌지우지했던 ‘3김(金)’이 사라진 정치판이 특히 초라하다. 말 한마디, 눈짓 하나로 추종자들을 제압하던 그들이 사라진 지금, 철부지 시절의 낡고 뒤떨어진 가치관만 고집하는 외눈박이 정치인들과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철부지 실세들만 가득한 형국이다. 양 김씨가 합의하면 정국의 물꼬가 순식간에 트였던 그 시절이 차라리 그립다.

종교계도 김수환 강원룡 등 ‘시대의 예언자’들의 권위가 빛을 잃어 가고 있다.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절 대통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이들을 이제는 해당 종교계 내부에서조차 깎아내리고 공격하려 든다.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뒤를 이을 차세대 영적 지도자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병철 정주영 등 창업 오너들이 사라진 재계도 그렇다. 자기 기업의 안위에 앞서 사업보국(事業報國)과 국가 발전을 생각했던 거물들은 사라지고 세상을 쉽게 산 재벌 2세와 학벌 좋고 머리 좋은 최고경영자(CEO)들만 가득하다. 정치는 기업을 사상 유례없이 못 살게 굴지만 재계 대표는 아들뻘 되는 여당 원내대표에게 연방 고개를 숙일 뿐이다.

김동리 서정주 황순원 김춘수 등 장르별 부족장(部族長)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문단도 마찬가지다. 적잖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문학적 업적으로 수많은 후학을 거느리며 제왕처럼 군림했던 그들의 시대에 비해 작금의 문단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고만고만한 글재주를 남발하면서 잔머리만 굴리는 글쟁이로 가득하다. 70대의 나이에 현역으로 100번째 작품에 도전하고 있는 임권택 감독이 버티고 있는 영화계 정도가 그나마 위안이 될 뿐이다.

존경받는 장군과 전쟁 영웅이 없는 군대도 걱정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군 원로와 역전의 용사들은 하릴없이 기득권 수호를 위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몰려드는 ‘보수 잔당’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신문을 지킨 대(大)사주와 최석채 선우휘 천관우 같은 대(大)기자가 없는 언론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권력자와 수시로 독대가 가능했고, 대통령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언론의 처지를 대변해 줄 수도 있었다. 메이저와 마이너, 보수와 진보,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모두 죽는 줄도 모르고 죽자 살자 헐뜯는 풍토에서 한국 언론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거장은 실력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고 제 식구를 거느릴 줄도 알아야 한다. 돈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탓할 수만은 없다. 거장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모두 추운 이 겨울,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이 그립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