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아나키즘을 초대하다

  • 입력 2004년 11월 7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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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내안의 상상력’의 표지 그래픽의 일부. 아나키즘은 자율적 개인의 소규모 동맹체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친 디지털문명적이고, 또한 문명보다는 자연회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다. 그래픽제공 돌베개
‘아나키즘, 내안의 상상력’의 표지 그래픽의 일부. 아나키즘은 자율적 개인의 소규모 동맹체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친 디지털문명적이고, 또한 문명보다는 자연회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다. 그래픽제공 돌베개
소규모 동호회와 삶의 방식 비슷… 관련책 봇물

환경운동 - 진보진영 등의 이념적 토대로도 각광

최근 지식인 사회에 아나키즘이 새롭게 주목받으면서 이를 다룬 책들이 대거 쏟아지고 관련 학회도 창립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또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문학 미술 영화 등의 예술작품들도 나오고 있다.

최근 나온 책으로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우물이 있는 집), ‘아나키스트의 초상’(필맥), ‘아나키즘 이야기’(이학사), ‘한국 아나키즘 100년’(이학사), ‘아나키즘, 내안의 상상력’(돌베개) 등이 있다. 지난주 출간된 ‘항일혁명가 구파 백정기 의사’(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역시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3의사로 꼽은 독립운동가였지만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로 잊혀졌던 백정기 의사의 삶을 다뤘다. 지난해 말 출간된 ‘아나키즘의 역사’(이룸), ‘우리시대의 아나키즘’(필맥)까지 포함하면 8권에 이른다.

이처럼 아나키즘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진보진영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할 사상으로서 아나키즘에 관심을 기울인 때문으로 보인다.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자율적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사상으로 각광 받았다. 일제강점기 이회영, 신채호, 김원봉, 김두봉, 박열, 김산(본명 장지락) 등 의혈단을 중심으로 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가 아나키스트였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한 아나키즘은 중앙집권적 조직력이 강한 마르크스주의와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서야 했다. 권력독점력이 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에게 무자비한 철퇴를 휘두른 것도 큰 요인이었다.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아나키즘의 부활을 낳은 셈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사상의 구심력보다 분절하고 단절하는 원심력이 강화된 것도 독립성이 강한 아나키즘이 재등장하게 된 배경이 됐다. 아울러 1990년대 이후 생태운동과 대안교육운동 등 소규모 공동체운동이 펼쳐지면서 강력한 중앙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아나키즘을 그 이론적 수원지(水源池)로 삼게 됐다.

이러한 지적 탈색작업을 통해 아나키즘의 혁명성과 폭력성이 완화되면서 아나키즘의 회고적 낭만성과 예술이 결부돼 영화와 문학, 대중음악, 미술 작품들에까지 아나키즘이 파고들었다. 개인주의의 강화와 소규모 동호회의 활성화라는 디지털시대의 라이프스타일에 부합한다는 점도 아나키즘의 수요를 확대시키고 있다.

특히 2001년 한국아나키즘학회가 출범한 뒤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 관련 서적의 출판 붐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구화가 가속화하면서 이에 대한 저항논리로서 아나키즘이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게 된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구승회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는 “최근 우파가 자유주의에서 대안의 담론을 건져내듯이 좌파에서는 아나키즘이 이론적 도매상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아나키즘은 극단적 자유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간 소통가능성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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