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류기봉씨 ‘포도밭 예술제’… 100여명 참석 詩잔치

  • 입력 2004년 8월 30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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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에 싸인 포도송이 아래 놓인 글과 그림을 보고 있는 시인들. 7년째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류기봉 포도원에서 열린 ‘포도밭 예술제’는 자연과 삶의 현장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사례다. 남양주=허문명기자
봉투에 싸인 포도송이 아래 놓인 글과 그림을 보고 있는 시인들. 7년째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류기봉 포도원에서 열린 ‘포도밭 예술제’는 자연과 삶의 현장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사례다. 남양주=허문명기자
29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류기봉 포도원. 자연과 인간과 시가 만나는 독특한 축제인 ‘시인 류기봉 포도밭 작은 예술제’가 열렸다. 이 예술제는 포도밭이라는 자연과 삶의 현장이 훌륭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포도밭 예술제는 1998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지만 올해는 좀 특이하게 치러졌다. 4000여평의 포도밭을 반으로 갈라 양옆 포도나무 열일곱 그루에 각각 시인과 문인 나무를 지정해 이름과 약력을 쓰고 옆에 시와 글을 적은 깃발을 만들어 건 것. 포도밭 이곳저곳에 모시천과 쌀자루에 커다랗게 글이 적힌 깃발들이 날리고 그 아래에는 그림까지 놓였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100여명의 문인과 가족, 친구, 일반인들은 포도밭을 맨발로 걸으며 시인들과 함께 시를 읽고 즉석 토론을 벌였다. 아이들과 함께 행사에 참석한 주부 허국희씨(35·남양주시)는 “요즘은 시를 접할 기회가 자주 없었는데 자연 속에서 시구를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면서 “아이들에게도 시를 들려 줄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말했다.

이 예술제는 현재 기도폐색으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의식불명 상태로 투병 중인 김춘수 시인(82)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1990년 김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 류기봉씨(39)는 스승의 뜻에 따라 자신이 운영하는 포도밭에서 이 예술제를 주관해 오고 있다.

당초 김 시인은 올해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고 흥이 나면 춤도 추겠다고 했으나 투병으로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김 시인이 대형 캔버스 위에 친필로 쓴 시 ‘디딤돌, 처용’이 있는 나무 앞에 사람들의 발길이 오래 머물렀다.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 밟히며 잠을 깬다/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서 있는 것을 본다/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금빛 깃을 치고 있다.’

류 시인은 포도를 싼 봉투 모양의 천에 아버지처럼 모셔 온 김 시인과의 추억을 적어 내 걸었고, 소설가 박완서씨도 축제를 기념하는 내용의 짧은 글을 보내 왔다. 수경 스님과 함께 지리산 탁발수행 중인 시인 이원규씨는 ‘만월’이란 시를, 고두현 시인은 ‘별이 된 꽃’이란 시를 적어 나무에 매달았다.

이날 행사에는 조영서, 정진규, 이수익, 송상욱, 서정춘, 노향림, 조정권, 이문재, 남진우, 박남준, 이원규, 고두현, 이덕규, 김행숙, 심언주씨 등 모두 50여 문인들이 시를 적어 올렸고 직접 가족 친구들과 함께 참석했다.

포도나무 산책이 끝나자 언덕 위에서는 풍성한 포도잔치가 열렸다. 주거니 받거니 햇포도주에 사람들의 얼굴도 석양빛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넓은 포도밭은 포도와 함께 정이 익어갔다.

남양주=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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