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날조된 歷史의 칼과 방패

  • 입력 2004년 8월 10일 19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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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역설적으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중국은 궁극적으로 반세기 넘게 유지돼온 한반도의 전후(戰後) 체제의 붕괴를 염두에 두고 있다. 북한이 무너지고 한반도가 남한 주도로 통일이 될 경우 어떤 체제가 국익에 가장 도움이 될까를 고민한다. 답은 자명하다. ‘통일 한국’이 미국이나 일본,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칫하면 중국을 겨냥한 비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막자면 한반도에 대한 ‘5000년 종주권’이 중국에 있음을 분명히 해둬야 한다. ‘고구려사도 중국사이고, 한국은 대대로 중국에 조공을 바쳐왔다’고 입력시켜 놓아야 한다.

확대해석이 아니다. 중국이 한국의 반발을 예상하고서도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밀어붙이는 이유가 고작 만주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 확보나 탈북자 대책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오히려 문제를 너무 좁게 보는 것이다. 국제체제란 일종의 유기체다. 늘 변한다. 평생 갈 것 같았던 미소(美蘇) 양극체제도 50년이 안돼 무너졌다. 국가라면 언제나 이런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하물며 장차 미국과 맞서 세계의 맹주가 되려는 중국임에랴.

한중(韓中) 역사전쟁은 크고 작은 갈등과 충돌을 낳을 것이다. 개인이건 국가건 과거에 대한 신원(伸寃)의 욕구는 폭력을 동반하기 십상이다. 이 전쟁은 한일(韓日) 역사전쟁의 성격까지도 바꿔버릴 수 있다.

불행하게도 고구려사가 끝내 중국사에 복속돼 역사 해석의 주체는 결국 ‘힘’이라는 사실이 새삼 확인될 경우 일본은 어떻게 나올까. 한일 과거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의 척도를 갖게 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고구려사가 그렇다면 한일 과거사도 다시 따져보자”고 나설 것이다.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선 한마디도 못하면서 신사참배만 가지고 뭘 그러느냐”는 조소도 각오해야 한다.

‘역사’라는 지적(知的)이고 심미적인 말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음습한 ‘패권주의 제국주의 야욕’이 정말 두렵다. 날조된 역사의 칼이 양쪽에서 치고 들어올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방패가 있어 이를 막아낼 것인가. 역사적 진실과 그 산물로서의 민족 정체성은 과연 지켜낼 수 있을까. 특별히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 전통적 맹방인 미국을 업고 싸우는 것 말고는.

역사가 빌미가 돼 한반도와 동북아의 현상유지(status quo)가 깨지려 한다면 이를 막아줄 균형추가 필요하다. 누가 기꺼이 그 역할을 해주겠는가.

‘한반도 영세 중립화’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약소국 외교론’의 행동원칙을 모르지는 않는다. 주변 4강을 자극하거나 어느 1강에만 치우치지 않도록 비이념적 중도적 노선을 택하자는 것인데 장기적으론 어떨지 모르나 지금은 맞지 않다. 솔직히 이 정권이 그런 고난도의 등거리 외교를 해낼 역량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가정이지만 고구려사 왜곡의 실체가 이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금 ‘자주(自主) 논쟁’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자신 있게 반미(反美)를 말할 수 있을까. 386 출신 의원들 사이에서 뒤늦게 자성(自省)의 소리가 나온다지만 이제는 제발 치기어린 반미 주장은 그만뒀으면 한다. 반미가 무슨 진보의 표상도 아니지 않는가.

이재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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