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손글씨의 美學’ 캘리그래피의 세계

  • 입력 2004년 6월 24일 17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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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가 희귀해진 시대. 아이들은 젓가락 대신 포크를 잡듯 연필을 잡지 않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뇌가 손가락 끝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일까. 자판을 두드리지 않으면 생각조차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사람들도 많다.

‘오려두기’와 ‘붙여넣기’로 쉽게 문서 하나를 만들 수 있는 현실은 10여 년 전만 해도 무성의의 극치로 여겨졌던 손글씨를 독특하고 정성스러운 표현 수단으로 보이게끔 한다.

홍익대 광고홍보대학원에 다니는 이계선씨(27·여·롯데백화점 디자이너)는 ‘광고홍보조사론’을 수강하면서 과제 리포트를 손으로 써서 냈다. “교수님의 출제 의도가 학생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타이핑보다 손으로 직접 쓰는 것이 나의 이해 정도를 보여 주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붓글씨의 터치와 춤의 동작은 닮은 꼴이다. 춤의 동작과 붓으로 쓴 글씨의 조화를 염두에 둔 춤 포스터. 디자인 최재원, 캘리그래피 여태명. 사진제공 필묵

이씨는 사귀는 남자친구로부터 “손으로 쓴 편지를 받을 때가 가장 기쁘다”고 한다. 그의 친구 역시 애타게 ‘손글씨 편지’를 갈망하던 중 남자친구에게서 아예 책으로 묶은 손글씨 편지를 선물받기도 했다고 한다. 현실에서 이제 손글씨는 대량복제시대에 새삼 그 가치가 돋보이는 ‘핸드 메이드’처럼, 드문 ‘선물’이 됐다.

소멸이 새삼 그 아름다움을 깨닫게라도 하는 걸까. 현실에선 ‘디지털 글씨’에 밀려 사라져가는 손글씨가 디자인의 영역에선 각광을 받는 추세다. 고딕 명조 등 디지털 활자 대신 붓을 잡고 손으로 쓴 글씨를 디자인에 활용하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가 부쩍 늘었다. 손글씨 공모전을 통해 ‘손맛’이 살아있는 글씨를 디지털의 영역에 도입하려는 폰트 개발 움직임이나, 기업체들이 고유의 글씨체를 만들려는 노력도 진행 중이다.

손글씨는 아직도 살아있다. (캘리그래피=김종건)

○ 디자인에서 각광받는 손글씨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디 갤러리에서 14일까지 열린 ‘제2회 캘리그래피 디자인전’은 먹을 묻혀 붓으로 쓴 글씨 디자인의 질감이 멋스럽게 살아난 전시장이었다. 여기에는 붓으로 쓴 손글씨를 새겨 넣은 옷, 시계, 유리, 도자공예품, 영화 포스터와 책 표지, 라면 우동 음료 등 포장 패키지 디자인들이 다양하게 선보였다.

성시경의 뮤직비디오 ‘외워 두세요’도 최근 붐이 일고 있는 캘리그래피가 적용된 사례. 연인과 헤어지는 아픔을 그린 이 뮤직비디오에서는 연인에게 추억을 각인시키기 위해 여주인공을 맡은 탤런트 신애의 몸에 글씨를 쓰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사진제공 필묵

전시회를 주최한 캘리그래피 디자인 회사 ‘필묵’의 김종건 실장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예를 시작해 원광대 미대 서예과를 졸업한 뒤 서예지 기자, 패키지 디자인 회사와 폰트 디자인 회사를 거치다 97년 경 일본의 상업서예를 보고 캘리그래피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는 “디자인에 손맛을 부여해 손으로 직접 그리고 만들면서 느끼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캘리그래피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설명한다.

붓으로 쓴 손글씨는 개성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글씨가 다른 비주얼과 얼마나 어울리느냐, 또 콘셉트를 어떻게 반영하느냐가 중요하다. 예컨대 영화 포스터 ‘챔피언’의 포스터 글씨체는 주연배우 유오성의 팔 근육의 이미지와 일치시켜 디자인됐다.

○ 디지털에 아날로그 접목

필묵은 폰트 개발회사인 윤디자인연구소와 함께 젊은 서예작가들의 작품을 모태로 청빈체 춘풍체 국향체 등 30여종의 서체를 개발한 ‘필 폰트’를 개발하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단어 전체의 조형미를 살릴 수가 없고 붓의 느낌, 먹의 번지는 상태 등을 표현해낼 수가 없어 글자 획을 따서 폰트를 만드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처럼 컴퓨터로 치는 디지털 글씨에 아날로그형 손글씨의 느낌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은 다양한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다.

윤디자인연구소는 2000년부터 손글씨 공모전을 개최해 1회 당선작 7종을 폰트로 만든 ‘다정체’ ‘민준체’ ‘세희체’등을 무료로 보급하고 있다. 윤디자인 연구소에서 손글씨를 기본으로 만든 스크립트 서체는 모두 50여종.

김원준 폰트디자인팀장은 “스크립트 서체는 개성이 강해 주목도가 높다”며 직업과 성별, 연령이 주는 느낌을 최대한 살려내는 것이 기본”이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소설가체는 글을 많이 쓰는 40대 소설가의 글씨체로 글을 흘려 쓰는 데 익숙해 각도가 덜 예민하고 획의 흐름 연결이 많다. ‘봄Ⅱ체’에서는 크레파스를 질감이 있는 종이 위에 대고 그은 듯한 느낌을, ‘카피라이터체’에서는 단문장을 주로 쓰기 때문에 속도감이 크지 않은 만년필 글씨의 느낌을 최대한 살렸다.

○ 업체도 서체개발 나서

캘리그래피 디자인 회사 ‘필묵’의 디자이너들이 올 추석에 개봉할 영화 ‘연인’의 포스터를 놓고 제목의 손글씨 디자인을 논의하고 있다. 이종승기자

이 밖에도 문자전문 사이트 ‘나@문자동맹’은 손글씨를 써서 보내면 e메일과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서 쓸 수 있는 나만의 글자체를 만들어 준다. 한국와콤의 펜마우스 ‘가라파이어3’는 컴퓨터에 패드를 연결하고 그 위에 펜으로 쓰면 그대로 아웃룩이나 워드의 문자작성 화면에 나타나 자신만의 글씨체로 e메일을 보낼 수 있다.

디지털의 표준화, 획일화를 극복하고 ‘개성 있는 나만의 글씨체’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기업에까지 번졌다.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삼성의 이미지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전용 서체를 개발하고 있다.

삼성의 전용 서체 제작 프로젝트를 맡은 산돌글자은행 석금호 사장은 이를 “그룹 CI 작업처럼 삼성의 정체성을 문자를 통해 보여 주려는 시도”라고 설명한다. 국내 기업이 자체 서체 개발에 나서는 것은 첫 사례로 해외에서도 벤츠 정도만이 전용 글씨체를 개발해 쓰고 있다는 설명.

석 사장은 “모든 것이 표준화되는 디지털 시대에도 ‘나만의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 감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말마따나 “서체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캘리그래피란?▼

손으로 쓴 글씨, 즉 육필문자를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는 기술. 서예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캘리그래피스트들은 펜 또는 붓에 의해 장식화된 글씨를 캘리그래피라고 규정한다. 기계를 이용해 기호나 상징을 그리는 ‘레터링’과 달리 캘리그래피는 직접 손으로 쓰는 모든 글자의 디자인 작업을 포괄한다. 중세 서양에서 전성기에 이르렀으나 르네상스 이후 회화 표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20세기부터 그 역동적 표현력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캘리그래피 관련 사이트▼

www.philmuk.co.kr

www.callidesign.co.kr

www.soolto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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