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력-정세따라 북방영토 의식 변화” 역사학대회 열려

  • 입력 2004년 5월 24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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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두만강 이남이 배타적 국경선이 된 것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선조들은 어디까지를 ‘우리 영토’로 간주했을까. 오늘날의 영토분쟁에서 과거의 ‘영토의식’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28, 29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전국역사학대회’는 최근 한중일 동북아 3국을 중심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영토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역사학 관련 15개 학회가 참여하는 이번 대회에서 특히 한국사연구회(회장 김도형 연세대 교수)는 ‘한국민의 영토문제와 영토의식’을 소주제로 설정해 집중 논의한다.

추명엽씨(서울산업대 강사·한국사)는 발표문 ‘고려시기 해동 인식과 해동천하’에서 고려시대의 역사적 의미가 반영된 영토 개념으로 ‘해동(海東)’ 또는 ‘해동천하(海東天下)’에 주목했다. 추씨는 “‘해동’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 랴오허(遼河) 동쪽 지역을 포함한 독자적 영역을 뜻하며 고려 국왕은 ‘해동천자’를 자임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12세기 초 금(金)의 건국으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이 약화된 후로는 ‘해동’이 실제에서 관념상의 개념으로 후퇴했고, 그나마 고려가 원(元)과 강화를 맺은 후로는 이 관념조차 축소됐다고 밝혔다.

윤훈표씨(연세대 강사·한국사)와 강석화 교수(경인교대·한국사)는 각각 조선 전기, 후기 북방개척이 진행되는 동안 영토의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검토했다.

윤씨는 발표문 ‘조선 전기의 북방개척과 영토의식’에서 “조선 초기 4군6진을 두어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북방을 개척한 것은 처음에는 명(明)에 대응하는 선언적 의도가 컸지만 점차 사회경제 부문에서 이 지역이 적극 활용되면서 문화적으로도 북방지역이 완전히 조선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청(淸)과 각각 두 차례 벌인 전쟁은 조선인들의 영토의식을 다시 한번 위축시켰다. 북방에 대한 영토의식이 다시 깨어난 것은 영, 정조 부흥기인 18세기 중반 이후였다.

‘조선 후기의 영토의식’을 발표할 강석화 교수는 “18세기 중반∼19세기에는 홍경모(洪敬謨·1774∼1851) 같은 핵심 관료들이 랴오둥에 다시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대외문제보다 탕평책 실시, 세도정치 혁파 같은 대내문제에 더 골몰해 북방개척의 실천의지가 약했다”고 지적한다. 대신 “북방지역 주민들이 중앙의 북방개척 명분에 고무돼 자신들의 월경에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강 교수는 지적한다. 이런 영토의식은 19세기 후반 함경도 주민들이 두만강 이북지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급격히 확산됐다. 이는 간도 영유권을 두고 1885년과 87년 청과 영토분쟁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 됐다. 02-739-0036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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