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경 ‘성에’ …“저버릴 수 없는 유혹, 사랑의 환상 좇아”

  • 입력 2004년 3월 22일 20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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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소설 ‘성에’를 내놓은 작가 김형경씨. 그는 이 작품에서 섣불리 맞닥뜨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작가의 맨 얼굴과 옛사랑의 현재 모습”을 꼽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새 소설 ‘성에’를 내놓은 작가 김형경씨. 그는 이 작품에서 섣불리 맞닥뜨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작가의 맨 얼굴과 옛사랑의 현재 모습”을 꼽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작가 김형경씨가 사랑을 둘러싼 환상을 들춰본 장편 ‘성에’(푸른숲)를 펴냈다.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난 젊은 남녀가 폭설로 길이 끊긴 외딴 산속에서 차례차례 시신들을 발견한다. 소설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실체와 일부일처제의 모순에 접근해 들어간다.

연희는 직장동료 세중과 함께 강원도 산골 마을의 어느 집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남자의 시신을 발견하지만 폭설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다. 둘은 악몽 같은 밤을 지새우고 집을 떠나려하지만 연희가 발목을 접질리는 바람에 하루 더 묵기로 한다. 세중이 마당의 눈을 치우는 도중 삽 끝에 여자 시신 한 구가 나타난다. 그 다음날에는 등산복 차림의 남자 시신이 눈 속에서 발견된다.

이들이 왜 죽었는지, 악몽 같은 일들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연희와 세중은 끔찍함에 몸서리치면서도 섹스에 탐닉한다. 이 작품 속에서 성(性)과 죽음은 일란성 쌍생아처럼 보인다.

김씨는 “최근 2년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경기 고양시 일산 집 뒤의 산에 자주 올라갔다”며 “산은 생명이 열매 맺고 소멸하는 과정을 통해 ‘우주의 비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우리 강산에 흔한 동식물인 박새, 청설모, 참나무를 내세워 숨진 세 사람의 피살 원인과 작품의 주제를 보여주려는 듯하다.

‘사람들은 박새와 기러기 새끼들의 유전자를 검사해서 절반 이상이 아버지와 다른 유전자를 가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했다. 그럴 때 박새는 인간들이 안쓰러웠다. 어떤 생물의 본성에도 맞지 않는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를 만들어 놓고 야생의 생물들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는 일종의 히스테리처럼 보였다.’(본문 중에서)

이 같은 결혼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일지 모른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환상을 버리지 마라. 환상이 사라지면 존재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작품 제목 ‘성에’는 구차하고 범속한 현실을 하얗고, 뿌옇게 보이게 만드는 그 무엇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것은 그 자체로써 아름답지만 언제가 녹아 스러져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다른 이름이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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