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벽화여,…' 역사학적 상상력으로 복원한 고구려

  • 입력 2004년 2월 27일 17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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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전호태 지음/276쪽 1만4800원 사계절

이따금씩 역사의 뿌연 안개 속에서 부상해 민족주의의 해류 속에 자맥질을 하다가 다시금 잊혀진 영토의 심해 속으로 자취를 감추곤 해 온 고구려. 100여개 고분 속 화려한 벽화에서 고구려의 구체적 실체를 복원하고자 20년간 공부해온 저자(울산대 교수)의 다채로운 해석이 고구려를 생생히 살려낸다.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베는 장수를 그린 벽화를 보며 매복에 걸려 포위된 백제 성왕에게 정중히 목을 내놓으라고 했던 신라 지방 군관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는 저자의 역사적 상상력. 고구려인이 즐겼던 교예가 페르시아에서 전래됐음을 추적해 내는 비교문화적 관찰력. 외부의 적을 향해 눈을 부라려야 할 사신(四神)들이 스스로를 응시하고 있는 사신도에서 외침에 맞서서는 승리했지만 내부 정치투쟁에 시달려야 했던 고구려의 비극적 정치사를 읽어내는 미학적 통찰력.

이렇듯 풍성한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생생한 컬러화보 속 고구려인들이 성큼성큼 벽화 밖으로 걸어 나오는 듯하다.

저자는 민족주의적 배타성에 빠져 중국과 일본 학계의 주장을 외면하지 않는다. 북한 평안남도 남포시 덕흥리 고분의 주인으로 13명의 태수를 거느렸던 유주자사 진(鎭)의 고향이 한반도의 평북 안천 일대냐, 중국의 허베이(河北)성 일대냐를 둘러싼 북한과 중국학자간의 논쟁을 객관적으로 소개한다. 낙랑군 등 한사군(漢四郡)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안에 자리 잡았을 것이라는 전통적 주장도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저자는 고구려가 고유의 문화에 부여, 옥저 등 예맥계는 물론 중국과 한사군의 문화와 중앙아시아 서역의 문화까지 받아들여 독자적 복합문화를 형성했다고 본다. 특히 5세기경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 부상한 뒤 제반 외래문화를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해 보편문화의 창출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평가한다. 이는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2호분 천장 별자리 벽화와 일본 나라현의 기토라 고분의 천장 천문도, 그리고 조선 개국 초에 그려진 천문도가 일치한다는 주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이처럼 보편문화를 일궈냈던 고구려 문화는 6세기 중엽을 전후해 수와 당의 연이은 침공으로 쇠퇴한다. 저자는 이를 평양 대 중국 지안(集安·국내성), 불교와 도교로 이원화하는 고분 벽화내용의 변화에서 읽어낸다.

고구려의 생활상은 책의 3분의 1 분량에 그치고 사후세계나 신화적 부분에 대한 설명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것은 무덤의 벽화라는 장르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후기로 갈수록 생활상은 사라지고 사신도 같은 추상적 그림에만 치중하는 벽화의 경향성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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