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04년 이마누엘 칸트 사망

  • 입력 2004년 2월 11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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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설은 너무 아름다워 그 본질에 진실을 간직하지 않을 수 없다.” (에드거 앨런 포)

태양계가 먼지와 가스로 이루어진 원시구름의 소용돌이에서 생겨났다는 ‘성운설(星雲說).’ 이 가설을 맨 먼저 제창한 이가 이마누엘 칸트다.

성운설은 코페르니쿠스 이래 천문학이 이룩한 가장 큰 진보로 꼽힌다.

성운설은 변증법적 사고를 태동(胎動)시켰다. ‘세계질서는 영원불변’이라는 형이상학의 낡은 집은 일시에 붕괴됐다. 마침내 자연(自然)은 시간의 역사를 갖게 된 것이다.

칸트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으나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 있었다. 시대는 바야흐로 봉건 전제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었다. 그 역사적 변화의 절정이 프랑스혁명이었고, 칸트철학은 그 시대적 격류의 소산이었다.

“칸트 철학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독일적 이론’이었다.”(마르크스)

칸트에게 인식이란 단순히 외계에 있는 사물의 모사(模寫)가 아니었다. 대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주관에 의하여 구성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인간이 ‘자연의 입법자’인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대로 경험하는 게 아니고, 마음의 메아리를 통해 여과되는 것만을 경험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고 말한 것은 인식론의 이 같은 중심이동을 이름이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1790년 완간되자마자 순식간에 독일의 대학과 논단을 석권했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의 정점이었고 피히테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의 시원(始原)이었다. 이 거대한 산맥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이 솟구쳐 오른다.

칸트는 독신으로 지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튈은 “칸트는 형이상학 못지않게 성(性)을 혐오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신을 숨 막히는 시간표 속에 감금했다”고 말한다.

그는 평생을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 엄격한 규율 속에서 시계처럼 살았다.

‘생각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말했던 칸트. 그는 그렇게 살다가 갔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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