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선비’ 류영희 일기…“연호가 ‘明治’라니… 애통하도다

  • 입력 2004년 2월 9일 19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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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선비인 농포 류영화가 40여년간 쓴 일기 중 일부. 매년 일기의 제목을 '일성록''영시록'등으로 달리 붙였다.
안동선비인 농포 류영화가 40여년간 쓴 일기 중 일부. 매년 일기의 제목을 '일성록''영시록'등으로 달리 붙였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되어 ‘대한 융희(大韓 隆熙)’ 네 자가 없어지고 연호를 ‘명치(明治)’로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다.…소위 통감이란 자가 국사를 마음대로 처리한 지 몇 년이 됐으니 우리나라에 임금과 나라가 없어진 것은 이미 오래지만 국호와 연호는 그래도 남아 있어 한줄기 법통이 있었는데, 이제 그 모습마저 살필 수 없으니 애통하도다….”(1910년 9월 4일)

한일병합 직전인 1909년부터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까지 40여년간 경북 안동에서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켜보며 기록한 한 선비의 일기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기는 한문으로 쓰였다. 한적(漢籍) 30여 책에 이르는 이 방대한 일기의 주인공은 안동에서 한평생을 올곧은 선비로 살았던 농포 류영희(農圃 柳泳熙·1890∼1960).

이 일기는 2002년 1월부터 민간 소장 국학자료 수탁(受託) 보관사업을 벌여 온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심우영)이 그동안 수집한 10만여점의 기록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전주 류씨(全州 柳氏) 함벽당 종가(涵碧堂 宗家)에서 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유물 72점 가운데 하나인 이 일기에는 한일병합, 3·1운동,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안동지역에서 어떤 모습으로 진행됐는지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읍내에 나갔다가 법흥동 이씨(고성이씨·固城李氏 일가)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1919년 3월 13일)

“장곡천(長谷川·제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말함)이 포고하기를 ‘각국에서 독립을 허용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으나 이는 근거 없는 말이니 모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하니 애통하고 가슴이 아프다….”(1919년 3월 14일)

안동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1858∼1932·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냄) 집안사람들이 서울에서 발원한 3·1운동을 안동 읍내에서 이어나갔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가슴 설레었던 농포는 바로 다음 날 독립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말을 듣고 가슴 아파했다.

6·25전쟁 이후에도 계속되던 일기는 1951년 7월 3일 “방공 연습이 수개월째 이어지니 사람들의 근심이 깊어지게 됐다”는 전쟁 중의 심회(心懷)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국학진흥원의 설석규 국학자료팀장은 농포의 일기에 대해 “안동에서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켜본 선비의 시각이 담겨 있는 자료”라며 “이를 통해 조선 유학의 본향인 안동이 일제강점기에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독립운동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국학진흥원 어떤 곳 ▼

한국국학진흥원 내 목판보관실에는 현재 기탁된 3만여점의 목판이 보관돼 있다. -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이번에 공개된 농포의 일기는 현재 국학진흥원 자료실에 가득 찬 기록유물들 속에서 찾아낸 ‘작은 보물’이다. 지역 민간문화재단으로 2002년 1월부터 민간 소장 국학자료 수탁 보관사업을 펼쳐 온 국학원에 기탁된 기록유물은 1월 말 현재 목판 3만점, 고서 3만점, 고문서 및 기타 4만점 등 총 10만점이 넘어섰다. 주로 영남지역 유학자 집안에서 기탁됐다. 2000점 이상의 유물을 맡긴 문중(門中)도 11곳에 이른다.

이 중에는 이미 문화재로 지정된 5000여점 외에 각 문중에서 전해져 온 문화재급 이상의 귀중한 기록들이 포함돼 있다. 현재 파악된 것만도 18세기 초 작성된 일종의 세계사 도표인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의 목판, 숙종 때 문신 권희학(權喜學)이 18세기 초 관서지방의 기근 상황을 둘러보고 기록한 ‘서정일기(西征日記)’ 등이 있다.

기록유물은 문중에서 원할 경우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지만 사실상 무기한 기탁된 것. 올해 말까지 국학원 구내에 지상 2층의 2개동(연건평 424평) 건물로 완공되는 장판각(藏板閣)에 정리 보관되며 디지털화 작업도 병행된다. 한국사 한문학 등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발품을 팔아 일일이 구해야 했던 자료들이 집대성돼 연구 효율도 높아질 전망이다.

국학원의 임노직 책임연구원은 “후손들은 도시로 나가고 홀로 종택(宗宅)을 지키는 노인들이 문중 유물을 지키느라 제대로 외출도 못하는 실정이기 때문에 기탁을 원하는 집안이 계속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호남 충청 경기 등 지역별로 이런 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이를 위해 안정적 재원 확보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국학진흥원은 앞으로 5년간 이 사업을 계속해 목판자료 10만장을 모은 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선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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