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기자의 현장체험]포장마차 '견습'

  • 입력 2004년 1월 29일 16시 38분


코멘트
포장마차 종업원이라고 서빙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짓궂은 손님들의 장난도 받아줘야 하고 옆자리에 앉아 술 한 잔을 받을 때도 있다. 때때로 아는 손님이 오면 근무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말동무도 해줘야 한다. 하루 동안 무려 300여병의 소주가 팔렸다.이종승기자ursisesang@donga.com
포장마차 종업원이라고 서빙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짓궂은 손님들의 장난도 받아줘야 하고 옆자리에 앉아 술 한 잔을 받을 때도 있다. 때때로 아는 손님이 오면 근무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말동무도 해줘야 한다. 하루 동안 무려 300여병의 소주가 팔렸다.이종승기자ursisesang@donga.com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김광균 ‘와사등’)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뎅’ 국물, 쌉쌀한 ‘꼼장어’, 그리고 소주 한잔.

시인의 노래를 연상시키듯 동네 앞 밤 길목에 흔들리는 불빛으로 기억되는 곳.

이제는 포장마차에도 경쟁논리가 도입돼 소위 ‘기업형’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아직 사람의 정(情)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떠나간 사랑과 지나간 세월, 가버린 친구가 발길을 잡는 곳. 짊어지고는 못 나가도 마시고는 가는, 술 있는 풍경. 서울 강남의 한 포장마차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본 모습.

○ ‘부킹하는 포장마차-빨대’

강남구 논현동 차병원 사거리에 있는 ‘부킹하는 포장마차-빨대’. 70여평에 좌석만 40여개나 되는 기업형이다. 매출액은 극비사항. 불황 때문에 많이 떨어졌다고만 했다.

이름은 ‘부킹하는 포장마차’지만 나이트클럽처럼 종업원이 손님을 끌고 다니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부킹이 가능한’ 것이지만 영업 전략상 그렇게 붙였다는 말. 영업시간은 오후 6시 반부터 다음날 오전 7, 8시까지다.

앞치마를 두르자 고참이 라이터 4개와 병따개, 볼펜 두 자루를 줬다. 간단한 설명과 함께 지배인이 오늘의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산 오징어가 한 마리밖에 없으니 주문받을 때 신경 써.”

오후 7시. 아직은 텅 빈 홀을 서성이는데 벽에 걸린 ‘빨대 사훈’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편하면 남이 힘들어진다.’

주문 받고 술과 안주를 나르고 수시로 청소를 하는 일 뿐이지만 2시간이 지나자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주문으로 한 좌석 당 평균 10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시켜도 될 일을 하나하나 시키다니.

“아저씨! 젓가락 하나!” “아저씨! 시원한 물 좀” “아저씨! 초장!” “아저씨, 아저씨….”

손님으로 왔을 때는 당연했던 일도 입장이 바뀌니 무척 달랐다.

○ '호칭'이 주는 명암

신문사에 입사해 온갖 취재를 다 해봤지만 그래도 면전에서 욕을 들은 일은 없다.

그래서 그런가. 손님들이 내뱉는 말에 갑자기 혈압이 올라갔다.

“야! 이 XX야. 담배 좀 사와!” “젊은 놈이 공부는 안하고….”

어떤 아가씨는 서비스로 내준 미역국 그릇을 “이걸 먹으라고?”하며 젓가락으로 툭툭 쳤다. 아니 그럼 목욕하라고 줬을까.

새삼스러웠던 것은 손님 입장에서는 정말 당연한 일-예를 들면 손뼉을 마주치며 부르는 행동이라든가, ‘어∼이’ 같은 말도 듣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모멸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대여섯 시간을 그렇게 일하다가 잠시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

“안녕히 가세요.”

편의점 아저씨의 공손한 말투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오후 10시가 넘으면서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4명 자리에 주문을 받으러 갔더니 한 명이 내 배를 보고 히죽히죽 웃으며 농담을 했다.

“아저씨 배에 뭐 감췄어?”

배가 나왔다는 뜻이겠지만, 그것도 유머라고…. 혈압이 또 오른다. 공손히 웃는 얼굴로 대했지만 바가지라도 씌워 응징하고픈 충동이 슬그머니 치솟았다.

○ 술 권하는 사회

밤이 깊어지면서 무슨 할말이 그리도 많은지 여기저기서 울고 웃고 고성이 오간다.

“임금도 뒤돌아서는 욕한다는데 공무원은 말도 못하고 사나.”

“우리 아내도 몸짱 아줌마처럼….”

“반지의 제왕이….”

그래도 제일 잘 들리는 말은 역시 “그 놈이∼”다. 변심한 애인을 원망하는…. 굳이 보지 않아도 그런 테이블은 통상 여자 3, 4명에 소주 3∼5병이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한 명은 운다. 내용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예의가 없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무척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커플 4명의 생일파티 자리. “아저씨 서비스 하나 주세요”라는 말에 무심코 반말로 응대를 했다.

“생일인데 남자 친구가 안주도 안 사주냐”고 윽박질렀더니 남자 친구 얼굴이 빨개진다. 술 먹는 것 외에는 참 순진한 애들이다.

오전 3시가 넘자 갑자기 ‘물’이 좋아졌다. 인근 룸살롱 언니들이 퇴근을 하며 오기 때문이다. 이곳이 나름대로 유명해진 원인 중의 하나다. 덩달아 남자들도 늘기 시작한다. 소위 ‘작업’을 위해 오는 분들이다.

취해서 그런지 별 사람이 다 있다. 취한 여자 친구 가방에서 돈을 꺼내 계산하는 파렴치한, 종업원에게 담배 한 개비 씩 5개비나 얻어 피우는 분, 종업원과 한잔하자고 붙잡는 찢어진 망사 스타킹 아가씨….

저쪽에서 소란이 일어 가보니 몹시 취한 한 허름한 중년 아저씨가 흐느적거리며 부탁을 한다.

“술 한잔 먹고 싶은데…돈이 없어….” 지배인이 그냥 자리에 앉힌 뒤 소주 한 병을 줬다.

마음이 영 안 좋아서 서비스로 오뎅탕을 드렸다.

○ 보∼람찬 하루 일을 끝내고나면

오전 6시.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왔다. 상식적으로는 함께 밤을 새웠을 것 같은데 말짱한 얼굴을 보면 아침에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직업도, 이유도 알 수 없지만 분명 해장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아니다.

오전 8∼9시경에도 많이 온다고 한다. 인근 신사동 ‘먹자골목’에 가면 초저녁보다 더 ‘바글’거린단다.

이미 동이 텄는데 손님들은 갈 줄 모른다. 지배인과 소주병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같은 기업형 포장마차 때문에 동네 포장마차들은 다 죽죠. 먹고 살려니까 하긴 하지만 얼마나 미안한데….”

“이런 일하는 사람들은 밥 한 그릇 사 먹을 때도 절대 종업원에게 반말 안하죠. 어떤 기분인지 아니까….”

오전 8시가 막 지나서야 가게가 텅 비었다. 밤새 태운 가스 난방기 때문에 시커먼 콧물이 나온다.

TV에서 정치인 누가 구속되고 뇌물이 어떻고 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동료 종업원이 지나가며 “뇌물 받아서 소주에 닭똥집 먹는 사람 봤어요?”라고 한마디 던졌다. 과욕이 어쩌구 하는 말도 하는 일에 따라 이렇게 언어의 조탁이 다르다.

막 퇴근을 하려는데 주위에서 “힘들죠”라고 웃으며 말했다.

뒷머리는 지끈거리고 다리는 저리다 못해 알이 박혔지만 못내 뿌듯한 느낌. 이런 것이 노동의 기쁨일까. 적어도 TV에 나온 분들보다는 떳떳한 하루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sys120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