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기원전 49년 카이사르 로마 진격

  • 입력 2004년 1월 9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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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의 속주(屬州) 갈리아의 총독이자 총사령관 카이사르.

기원전 49년 보수파가 장악하고 있던 원로원이 그에게 무장해제와 로마 복귀를 명하자 그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리고 로마로 진격한다. 반란(叛亂)이었다.

그 4년 뒤. 내전을 승리로 이끈 카이사르는 공화정을 타도하고 1인 독재시대를 열게 된다.

카이사르는 ‘관용의 정치’를 폈다. 측근들이 작성한 살생부(殺生簿)를 물리쳤다. 적장 폼페우스의 재산을 가족들에게 돌려주었고 평생의 정적 키케로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적(敵)조차도 신뢰하지 않고는 정치를 할 수 없다.”

로마인들은 안도했다. 그들이 가슴을 쓸어내릴 때 개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속주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고 해방된 노예들에게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세계의 표준이 되는 달력과 기축화폐를 만들었다. 그는 다인종 다민족 다종교 다언어의 로마세계에 ‘문명의 기준’을 제시했으니 그것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기틀을 다지는 것이었다.

헤겔은 카이사르의 독재가 세계정신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그는 고대세계가 낳은 최후의 독창적 천재다.” 괴테는 카이사르의 암살을 세계 역사상 가장 무의미한 행위로 규정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초월할 정도로 위대했다.

그는 1급의 문인이었다.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는 간결한 문체 속에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꿰뚫어본 라틴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는 또 키케로, 호르텐시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탁월한 웅변가였다. 대중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카이사르는 생전에 황제를 자칭한 적이 없었으나 사후 그의 이름은 황제라는 호칭이 되었다. 그의 인간적인 매력과 그 최후의 비극성은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에 의해 그려졌다.

카이사르, 그는 항상 ‘운명의 여신’과 함께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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