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12월 둘째주

  • 입력 2003년 12월 7일 18시 49분


코멘트
6·25전쟁 전후 서울의 한 사창가 풍경. 이 시기에 번성하기 시작한 기지촌, 종삼 등의 윤락녀들은 지나가는 남성의 팔을 잡아 끄는 등 적극적으로 호객행위를 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자료사진 ‘서울 20세기’
6·25전쟁 전후 서울의 한 사창가 풍경. 이 시기에 번성하기 시작한 기지촌, 종삼 등의 윤락녀들은 지나가는 남성의 팔을 잡아 끄는 등 적극적으로 호객행위를 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자료사진 ‘서울 20세기’
▲治安局 통계에 의하면 전국의 접대부 및 위안부의 총수는 17,349명에 달하고 있다고…▲그런데 이들을 년령별로 보면은 15歲-20歲=4,098 21歲-25歲=7,673 26歲-30歲=3,552 31歲-35歲=1,386 36歲-40歲=640 ▲그리고 학력별을 보면은 大學=70 中學=1,786 小學=7,321 無學=8,272 ▲이와 같은 숫짜는 우리나라의 빈곤과 타락과 허영에 사로잡힌 사회상의 일부를 엿보여주는 것으로… ▲전기 大學, 中學까지 나온 식자층 여성들의 그 같은 타락상은 미웁기 짝이 없고… ▲반면 부모 형제를 잘못 맞난 15세 소녀들의 환경이란 불상하기 그지 없군…

<1953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휴지통’에서>

▼대학 나온 접대부 화제… ‘종3’ 전성시대?▼

6·25전쟁 직후의 시점은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과 함께 이른바 종삼(서울 종로3가)으로 대표되는 ‘내수용’ 홍등가가 막 번성하기 시작하던 때다.

정부는 서울 수복 뒤 종로3가 일대에 국회의사당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운 일이 있다. 그 같은 방침이 흐지부지되는 사이에 철거대상지에 윤락여성과 포주들이 몰려들어 거대한 환락가를 형성한 것이 바로 종삼이다.

기생으로 불리던 요정의 ‘접대부’들이 소극적인 방법으로 웃음을 팔았다면, 이 윤락가의 ‘위안부’들은 행인의 소매를 잡아끄는 등 보다 노골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윤락이 사회문제로 대두될 때마다 당국의 단속이 되풀이되곤 했다.

기사에 소개된 치안국 통계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지금이야 ‘아르바이트’로 매춘을 하는 여대생도 흔하다지만, 그 시절 어지간한 대갓집도 딸자식 대학 보낼 엄두를 못 냈을 터에 대학 나온 접대부와 위안부가 있었다니 이채롭기도 하다.

1961년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제정되고 69년에는 종삼 윤락가가 철거되는 등 매춘에 대한 규제는 해를 거듭하며 강화돼 왔지만 매춘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되어 온 게 현실이다.

올 2월 발표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은 모두 33만명이고 여기서 발생하는 경제규모가 국내총생산의 4.1%, 24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청량리 588’과 ‘미아리 텍사스’ 등을 포함한 전국의 윤락가는 69개소, 이곳의 윤락여성은 9092명으로 조사됐다.

그나마 매매춘의 현황을 지나치게 적게 추산했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니 이제는 매매춘의 ‘타락상’을 탓하는 것조차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