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11년 아이작 싱어 출생

  • 입력 2003년 10월 26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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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아기를 등에 업은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머리에 이고 마포나루를 건너던 재봉틀. 이 땅의 언니 누나들이 어린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밤새 눈을 비비며 돌렸던 봉제공장의 재봉틀.

그 재봉틀이 1851년 미국인 아이작 싱어가 개발한 ‘싱거 미싱’이었다. 집안의 재산목록 1호로 대물림하면서 한식구 못지않게 정을 붙여온 재봉틀이 안방에서 자취를 감춘 지도 오래다.

하지만 손바느질이 2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비하면 기껏 400년 남짓 헤아리는 재봉틀의 등장과 소멸은 인류의 역사에 잠시 스쳐가는 거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재봉기는 영국의 윌리엄 리가 부인이 털실 뜨개질하는 것을 보고 1589년 처음 고안해냈다. 바늘 끝에 구멍이 뚫린 재봉기는 1834년 선보였다. 싱어는 페달장치가 달린 가정용 재봉기를 개발해 대량생산에 나섰으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국내에 들어온 게 바로 이 싱거 미싱이다.

그런데 왜 ‘미싱’이라고 불렀을까.

미싱은 머신(machine)의 일본식 발음. 당시 조선인들에게 재봉틀은 처음 다뤄 보는 기계문명이었고 재봉틀 그 이상이었다. 호미나 괭이 같은 도구와는 차원이 다른 ‘기계’ 그 자체였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폴 망투의 말대로, 재봉틀은 ‘손의 연장(延長)’인 도구와는 달리 그 자신의 도구를 갖고 있는 희한한 메커니즘이었던 것이다.

12세에 가출해 기계공으로 자수성가한 싱어. 그는 다섯 명의 부인을 거느렸으며 자신의 혈육이 정확히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한량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가로서 탁월했다.

사상 최초로 월부판매를 도입했으며 애프터서비스(AS), 물품교환, 할인혜택 등 현대적 경영기법을 선보였다.

그가 설립한 ‘싱어컴퍼니’는 당시 시가총액 기준으로 제너럴 일렉트릭(GE)에 이어 8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GE가 지금 세계 최고 기업으로 우뚝 솟은 반면 그의 회사는 재봉틀의 운명만큼이나 급속히 쇠락(衰落)의 길을 걷고 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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