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목욕탕]두메산골 목욕탕 생긴 날

  • 입력 2003년 9월 4일 16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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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목욕하러 가요…”경기도 가평군 북면마을 복지회관에 목욕탕이 처음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한 2일 오후, 이한기(71) 김남실씨(67) 내외가 목욕채비를 하고 나섰다. 가평=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우리 목욕하러 가요…”경기도 가평군 북면마을 복지회관에 목욕탕이 처음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한 2일 오후, 이한기(71) 김남실씨(67) 내외가 목욕채비를 하고 나섰다. 가평=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그것은 ‘사건’이었다. 경기 가평군 북면. 수덕산과 명지산 인연산 등 3개의 산 사이로 난 V자형 협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

산속 깊숙이 파묻힌 두메산골에 드디어 대중 목욕탕이 생겼다.

13개리에 3700여명이 모여 사는 북면에서 목욕탕은 ‘소방서 우체국 학교 교회는 다 있는데 그것만 없어 불편했던’ 주민들의 최대 숙원사업이었다.

도시는 지금 집집마다 욕실이 있고 거리엔 한 집 걸러 하나씩 스파나 사우나, 찜질방이 생겨날 정도로 ‘목욕탕 과잉시대’. 이미 유행에 뒤져 차츰 사라져 가고 있는 소박한 대중목욕탕 하나가 무에 그리 소망스러웠을까.

‘드디어 목욕탕이 있는 마을에서 살게 된’ 북면 사람들로부터 들어본 목욕 이야기, 그 생활의 발견.

●목욕탕 개관 사건

정식 개관을 하루 앞둔 2일. 북면 복지회관 1층에 들어선 목욕탕을 시험 가동 하는 이날, 부녀회원들은 보일러를 돌려 물을 데우고 탕에 물을 채우느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가평군청에서 북면 부녀회에 운영을 위탁한 ‘공립’ 목욕탕인 터라 이름도 없고 간판도 없지만, 소문을 듣고 온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여탕을 둘러보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이제 시어머니 눈치 안 보고 목욕 다녀도 되겠구먼”이라며 반가운 기색이었다.

“나이든 사람이 목욕탕의 첫 물에 들어가면 안 좋다던데….”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남탕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괘념치 않고, 박종억 할아버지(74)는 초등학교 3학년인 손자 동수를 데리고 온탕에 풍덩 뛰어들었다.

“읍내 목욕탕에 손자 녀석만 보낼 수도 없고 해서 답답했거든. 버스 타고 꽤 나가야 되는데 애들끼리 보내기가 좀 그렇잖아. 이젠 그 걱정 안하고 손자 녀석이랑 마실 가듯 목욕탕에 올 수 있게 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매주 수, 일요일 이틀만 문을 여는 목욕탕이지만 북면 주민들이 이 목욕탕을 갖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가평군의 6개 읍 면 가운데 북면은 목욕탕이 없는 유일한 동네다. 가장 가까운 목욕탕은 가평읍내. 읍내에서 가장 먼 마을 적목리에선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가야 하는데 그나마 하루에 5번밖에 다니지 않는다. 볼 일을 보러 가평읍에 나가도 목욕을 할 시간적 여유는 거의 없다. 북면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버스가 오후 6시20분에 출발하기 때문. 전체 주민 중 4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65세 이상 고령자에겐 장시간 버스를 타는 일도 고역이었다.

참다못한 노인회는 지난해 가평군청에 목욕탕 시설을 유치해달라고 건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사설업자를 유치할 수도 없었던 군청 측은 고심 끝에 2억원을 들여 목욕탕을 공립 시설로 짓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

“시원∼하네 그려.” 2일 북면 목욕탕을 처음으로 찾은 동네 노인들의 표정엔 만족감이 가득하다. 복지회관내 들어선 목욕탕은 군청예산으로 지원되는 주민 복지시설. 매주 수, 일 오전7∼오후7시. 어른 1500원, 어린이 800원. 가평=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 목욕?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여

“목욕? 그게 아무 때나 하는 건감?”

한가위를 앞두고 1일 한 해의 농사에 감사하는 산제를 지낸 경기 가평군 북면 목동리의 노인들은 “목욕탕이 이틀만 일찍 문을 열었어도…”하면서 아쉬워했다. 산제를 지내기 전 목욕재계를 하기 위해 일부러 버스를 타고 가평읍내에 단체 목욕을 다녀온 것. 이들에게 목욕은 단순히 몸의 때를 벗겨내는 절차를 뛰어넘는 일종의 ‘의식(儀式)’이다.

“이 목욕이란 게 그렇게 아무 때나 몸을 까놓고 그러는 게 아니야.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다는 건 무슨 큰일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는다는 의미가 있는 거지.”

조기형 할아버지(78)는 “평소엔 집에서 등목이나 하면 되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어야 목욕을 간다”고 한다. 그는 “이번 추석에는 목욕탕이 가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덧붙이면서 ‘정갈한 마음’을 계속 강조했다.

“그냥 몸에 물이나 끼얹고 신체의 청결만 강조해서는 안 되는 법이여. 매일이면 매일 마음도 그렇게 씻을 수 있어야 진정한 청소가 되는 거지. 세상에 지저분한 게 어디 먼지나 때뿐인가?”

● 목욕? 그게 뭐 별 것인가

“목욕탕이 생겼다고? 그거 참 반가운 일이네.”

북면 산골마을 적목리 마을 어귀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박병주 할아버지(83)는 “이제 나도 마음대로 목욕탕에 다닐 수 있게 됐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가게문을 아무 때나 닫을 수가 없어 읍내로 ‘목욕 출장’을 가려면 한 두달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별러서 가야 했기 때문.

겨울을 제외하고 그가 평생 목욕탕으로 삼아온 곳은 뒷산의 개울이다.

“목욕이 뭐 별 다를 게 있나, 그것도 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거지. 그냥 개울에 몸을 한 번 담갔다가 나오면 그게 목욕이지. 장에 갔다 와서 냉수마찰 한 번 하면 ‘뿌드∼읏’ 했지.”

마을 중심가로 내려와 북면 노인회관에서 만난 구영회 할아버지(71)에게도 목욕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기분 전환과 친목도모용 이벤트다.

“보통 음력 5월경부터 9월까진 지금도 개울에서 목욕을 할 만해. 사람들과 함께 가면 놀러나온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겨울엔? 목욕 못하는 거지, 뭐. 음력 9월이 지나면 추수도 끝나고 할 일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때가 끼일 일이 뭐 있나.”

그는 “동네에 목욕탕이 생겨 편해지긴 하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목욕은 날 풀린 뒤 개울에서 겨우내 쌓인 때를 벗기는 ‘봄맞이 목욕’이 제일”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해 줄께” 모처럼만에 손주 동수군(9)과 목욕을 즐기고 있는 박종억 할아버지(74)의 팔에는 힘이 실렸다. 가평=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 목욕? 우린 그것도 쉽지 않았어

“목욕? 그게 어디 남자들 일이지 우리 여편네들이 하는 건감? 인제 좀 달라지겠지.”

부녀회관에 모여 있던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목욕탕 개관을 맞는 심정은 남달랐다.

“아, 남정네들이야 목욕하고 싶으면 냇가에서 낮이건 밤이건 훌러덩 벗고 하면 되지. 하지만 우리는 그게 되나. 한 번 씻으려면 저녁 먹고 어스름해진 뒤 산골 깊은 데 가야 하는데. 목욕 도구나 뭐 따로 있나. 그냥 물에 들어가 손으로 뽀득뽀득 씻는 거지. 겨울엔 별 수 없이 읍내 목욕탕에 가는데 버스도 잘 안 오고, 멀기도 하고, 어휴∼, 말도 마.”(이종순·69)

“겨울에 읍내까지 가기가 귀찮으니까 부엌에서 물을 데워서 쓰기도 하는데, 시어른과 며느리가 함께 사는 집이면 그것도 참 못할 짓이야. 아, 생각해봐. 시어머니가 방에 떡하니 누워있는데 야심한 밤에 여편네가 물 끼얹는 소리 내기가 쉽지 않잖아. 누워있는 시어머니나, 목욕을 하는 며느리나 서로 불편한 일이지.”(구월순·73)

이들에게 동네 목욕탕의 개관은 불편함과 쑥스러움을 무릅써야 했던 목욕의 수고를 덜어주는 낭보다. ‘개울 목욕’ 경험이 여러 번 있는 정명숙씨(40)에게도 마찬가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에 저녁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을 즈음이면 동네 아줌마들이 개울로 목욕가자고 골목에서 불러내곤 했어요.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어떻게 해요. 씻기는 해야 되는데….”

이 마을에선 ‘젊은 처자’에 속하는 그는 그래도 시부모 세대에 비해 목욕을 자주하는 편이다. 하지만 겨울에 부엌에서 목욕하는 것 만큼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족들 눈치를 보다가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지면 하루를 틈을 내 가평읍 목욕탕으로 향했다. ‘젊은 것이 목욕을 밝힌다’는 꾸지람을 들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러던 차에 동네 한가운데에 목욕탕이 생겨 “후련하다”는 그에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교 3학년생 딸이 “다른 사람들 앞에 벗은 몸을 보이기 싫다”면서 목욕탕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실랑이가 한창이다.

“내 생각엔 엄마랑 딸이 서로 등도 밀어주면서 못했던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목욕탕이 꼭 씻기만 하는 곳은 아닌데, 요즘 애들은 그런 게 싫은가 봐요.”

가평=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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