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불멸의 예술혼 불꽃으로 살아난다…권진규 ,차학경展

  • 입력 2003년 8월 29일 17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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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창조성으로 몰고 가는 자극제’라고 했다. 끊임없이 창작의 동력을 찾아야 하는 예술가들의 삶이 때로 비극으로 점철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9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두 걸출한 예술가의 전시가 열려 주목받고 있다.》

▼권진규展…'흙 테라코타' 사용 인물 조각 숨쉬듯 ▼

▽권진규전=9월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조각가 권진규(權鎭圭·1922∼1973·사진)전은 한국 현대 조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그의 30주기 회고전이다.

권진규는 1959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 14년간 흙을 사용한 테라코타와 종이에 옻칠을 한 건칠(乾漆)이라는 독창적 소재로 인물, 동물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한국 조각의 리얼리즘 분야를 개척했다.

한때 중학교 미술교과서에도 실렸던 권진규작 ‘지원의 얼굴’. -사진제공 인사아트센터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벌이던 쉰한 살, 서울 성북구 동선동 작업실에서 돌연 목을 매 자살한 그는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 오후 6시 거사’라는 유서를 남겼다.

그의 삶은 곡절의 연속이었다.

스무 살 때인 1942년 미술 공부를 위해 도일(渡日)했으나 징용을 당해 1년이나 비행기공장에서 강제 노역했고 탈출에 실패해 다시 1년을 방공호에 숨어 살아야 했다.

광복 후 귀국했다가 48년 다시 도일한 그는 도쿄예술원을 거쳐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세계적 조각가 부르델의 제자인 시미즈 다카시에게 조소를 배웠다.

일본 공모전에서 잇달아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낼 즈음인 59년 귀국했다.

그러나 고국의 반응은 차가웠다. 추상 조소가 주류를 이뤘던 당시 한국 조소계는 구상 조소인 그의 작품의 독창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장식이나 기념비 정도로 여겼다. 내성적이었던 작가는 고혈압 수전증 우울증에 시달렸고 급기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死後) 전시는 이번이 세 번째. 74년 명동화랑에서 1주기 추모전이 있었고, 15주기였던 88년 호암갤러리에서 본격적인 회고전이 열렸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지원의 얼굴’ ‘자소상’ ‘춘엽니’ ‘말’ 등 기존에 알려진 작품 외에 20여점이 최초로 선보인다는 것.

전시작 중 석고 틀에서 재현한 부조인 ‘여인’ ‘작품’ 등은 최근까지 그의 작업실을 그대로 보존해 온 막내 여동생 경숙씨가 내놓은 것이고, ‘여인상’은 모델이었던 권진규의 제자가 소중히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일본에서 권진규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던 오기노 도모 여사가 내놓은 스케치북 두 권에는 고인이 1950년대에 그린 38점의 드로잉이 담겨 있다. 자료적 가치뿐 아니라 미학적 가치도 높다는 평이다.

동선동 작업실에 남긴 유서를 포함해 손때 묻은 기물과 유품들도 선보여 ‘인간 권진규’를 다각도로 조망해 볼 수 있는 기회다. 02-736-1020

▼차학경展…페미니즘 미술 선도…미국서 더 명성

▽차학경전=9월 5일부터 10월 26일까지 서울 마포구 창전동 쌈지 스페이스에서 회고전이 열리는 여성 예술가 차학경(1951∼1982·사진)은 국내에는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페미니즘 미술과 포스트모던 미술의 선구자로 미국 문화계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

한국인으로는 백남준 이후 두 번째로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으며 그가 남긴 서사시적 소설 ‘딕테(DICTEE)’는 미국 UC버클리대 비교문학과에서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평가가 나 있다.

1951년 부산 태생인 고인은 1963년 가족들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한 뒤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다. UC버클리대에서 비교문학과 미술을 공부한 뒤 사진, 영화, 연극, 퍼포먼스, 저술 등 장르와 매체를 뛰어넘는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1980년 뉴욕으로 이주한 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디자인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차학경의 비디오작품 ‘눈먼 음성’의 한 장면. 언어의 한계를 표현했다. -사진제공 쌈지스페이스

한창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서른한 살 때인 1982년 뉴욕 맨해튼의 한 빌딩에서 작업하던 사진작가 남편을 만나러 갔다가 빌딩관리인에게 성폭행 당한 뒤 잔인하게 살해돼 이튿날 빌딩 주차장에서 발견됐다.

‘관객의 꿈’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번 회고전에서는 짧은 생애 동안 이산(離散)의 기억과 언어의 상실을 주제로 탈장르 작업을 한 고인의 삶과 작품 세계가 전시, 심포지엄, 도록, 연극 등을 통해 소개된다.

UC버클리대 버클리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콘스탄스 르월른이 기획한 회고전은 2001년부터 시작해 미국 미술관 5곳을 순회했으며 이번 서울전이 6번째다.

전시작품 40여점은 고인 가족이 기증한 작품들과 피해 보상금으로 운영되는 버클리미술관 내 차학경기념관 소장품들. ‘눈먼 음성(Aveugle Voix)’ 등 비디오 및 필름, 설치, 아티스트 북, 드로잉, 슬라이드와 함께 그가 죽기 직전까지 제작 중이던 미완성필름 ‘White Dust from Mongolia’가 선보인다.

5일 오전 11시에는 탈식민주의, 기호학, 젠더론 전문학자들과 문학 미술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심포지엄 ‘차학경의 이해’가 열리며 오후 7시 반에는 극단 뮈토스(대표 오경숙)가 차씨의 작품 ‘딕테’를 무대화한 연극 ‘말하는 여자’를 공연한다.

버클리미술관 전시와 함께 발행된 전시도록도 눈빛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다. 02-3142-1693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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