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도량 서울 승가사 하안거 들어가던 날

  • 입력 2003년 5월 16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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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사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비구니 선방을 운영하는 곳이다. 북한산 비봉 동쪽 1㎞ 지점에 있는 승가사는 신라 경덕왕 때(756년) 수태대사가 만든 고찰.해방이후 거의 폐사가 됐지만 상륜스님이 70년대초 주지로 부임하면서 200억원 가까운 불사를 통해 사찰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승가사는 최근 이남기 전공정거래위원장이 SK그룹에 이곳에 10억원을 시주하라고 강요했다는 혐의로 구속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어수선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절집은 평온하고 차분한 분위기였고 치성을 드리려는 신도들만 가끔 왔다갔다할 뿐이었다.

재무담당 진묵 스님은 “절집 밖 일은 절집 밖 일이고 수행은 수행”이라며 “승가사에는 일년 내내 죽비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수행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오후 7시반. 결제 공사(안거 기간중 스님들이 맡을 소임을 정하는 것)가 열렸다. 이들은 앞으로 새벽 3시에 일어나 오후 10시까지 식사 시간 등을 빼고 하루 10시간 참선에 몰두하게 된다.

이들 중에는 ‘3년 결사’ 중인 스님 4명도 있다. 3년 동안 일주문 밖을 나가지 않고 정진하는 것. 올 9월이면 3년을 채운다. 이들은 기자의 질문에 ‘한 생각마저 끊어진 자리를 찾으려는 수행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각 소임은 자원을 받는 형태로 이뤄졌다. 스님들은 ‘잘 살겠습니다’를 복창하며 소임을 맡았다. 이윽고 주지인 상륜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처음엔 하안거 공부에 대해 말하던 상륜 스님은 시주금 사건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10억원이 만약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면 다시 돌려주겠다. 하지만 검찰이 우리를 부정한 집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기가 막힐 따름이다. 원래 안거 때는 바깥 출입을 안하지만 20일 이씨 재판 때 3년 결사 스님을 뺀 나머지 스님들과 함께 법정에 가려고 한다.”

결제 공사는 모든 스님들이 차를 한잔씩 나누며 덕담을 하는 것으로 끝냈다.

다음날 새벽 3시, 도량석과 함께 스님들은 예불을 드린 뒤 참선에 들어갔다. 번거로운 세상 일도 있지만 석달간 칠통(漆桶) 같은 무명(無明)을 끊으려는 화두 챙김이 시작된 것이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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