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 6년만의 신작 '마네킹'…내 속의 '나 아닌 삶'

  • 입력 2003년 5월 5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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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하나코는 없다’의 소설가 최윤(50·서강대 불문과 교수)이 6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마네킹’(열림원)을 펴냈다.

작가는 껍데기뿐인 삶을 벗어던지고 집을 떠나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해가는 광고모델 지니를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마네킹’이라는 제목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인식하지 못한 지니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

생후 3개월 때부터 광고모델로 일하며 빈한한 가족의 욕망을 채워줘야만 했던 지니. 어린 시절, 끔찍한 폭행의 후유증으로 지니는 목소리를 잃는다. 잠깐의 쾌락을 위해 막내딸의 목을 눌렀던 손의 주인이 누구임을 알고 있었던 엄마는 자책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오빠와 언니에게 지니는 하나의 ‘상품’일 뿐이었다. 지니의 얼굴과 목덜미, 발과 팔꿈치, 하다못해 귓바퀴까지. 조금씩 갉아 먹히는 한 알의 사과처럼 살아 온 17세의 지니는 어느 날 수중 광고촬영을 하기 위해 제주의 바다를 유영하는 경험을 하게 되고 이 촬영을 마지막으로 지니는 집과 ‘마네킹’으로 살아온 삶을 떠난다.

걸인처럼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지니는 ‘기쁨과 충만의 회오리가 몸을 휘돌아가는 바로 그대로’ 춤을 춘다. 지니의 춤, 미소와 눈빛은 외롭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곧 위안이 된다.

지니가 없어지자 오빠는 무인도를 사서 그곳에 스스로를 유폐한다. 언니는 동생에 대한 애증으로 괴로워하다 지니의 대역이 된다. 막내딸의 불행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엄마는 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하며 점차 미쳐 간다.

한편 지니의 매니저로 누구보다 지니를 잘 알고 사랑했던 ‘소라’와 수중에서 단 몇 초간 지니를 보고 자신의 인생을 바꿔 버리는 ‘쏠배감펭’이 한편에 있다. 이 둘은 함께 지니를 찾아 나선다.

소설의 첫 장면은 어느 겨울, 암벽 위 작은 동굴에서 잠시 잠자는 것처럼 누운 채 죽음을 맞는 지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 듯 정적으로 그려진 공간을 지나 욕망으로 충만한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면 지니는 사라지고 ‘기생(寄生) 인간’들이 겪는 의식의 균열이 칼로 베어낸 듯 날카롭게 다가온다.

작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이 이 작품을 쓰게 했다.… 여전히 세상의 한쪽이 비옥한 것은 검은 구멍을 벌리고 빈곤하게 말라가는 불행한 영혼들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더 빈번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났던 아름다운 그들로부터 ‘그녀’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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