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한영우/버려진 역사 '대한제국'

  • 입력 2003년 4월 27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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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14일자 독립협회 기관지 ‘독립신문’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기사가 보인다. “12일 오전에 위의(威儀)를 갖추고 황단(皇壇)에 임하시어 하느님께 제사하시고, 황제위(皇帝位)에 나아가심을 고하시고 환어하셨으며, 이날 정오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폐하께 하례를 올리니 백관이 즐거워들 하더라. 이날 밤 장안 사사집과 각 전(廛)에서 색등불을 밝게 달아 장안 길들이 낮처럼 밝았으며 집집마다 태극국기를 높이 걸어 인민의 애국심을 표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얼굴에 즐거운 빛이 나타나더라. 새벽에 공교히 비가 와서 의복들이 젖고 찬 기운이 성하였으나 국가에 경사로움을 즐거이 하는 마음이 더 중한 고로 여간 젖은 옷과 추움을 생각지들 아니하고 사람마다 다 당한 직무를 착실히들 하더라.”

▼원구단 황제즉위식 잊혀져 ▼

이 기사는 고종이 원구단에 가서 하늘에 제사하고 황금 의자에 앉아 황제에 즉위하던 날 서울 장안의 경축 분위기를 전하는 내용이다. 명성황후의 참변이 일어난 을미사변 이후 일본에 대한 복수와 진정한 자주독립을 절규하는 국민 여론이 드디어 대한제국을 탄생시켰으니, 차가운 가을비에도 불구하고 길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밤에는 색등불을 걸어 황제국의 탄생을 경축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대한제국은 비록 14년의 짧은 역사를 남긴 채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주독립한 민국(民國), 경제적으로는 산업화를 일구어 근대국가를 건설하던 중요한 시기였고, 그 주역인 고종은 을사조약을 반대하다가 퇴위를 강요당하고, 망국 이후에도 국권회복의 꿈을 버리지 않다가 1919년 1월 21일 독이 든 식혜를 들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3·1운동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고종의 독살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대한제국의 멸망이 아니라 대한제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다. 패장은 할 말이 없다고 하지만, 패장에게 뒤집어씌운 온갖 중상은 벗기는 것이 마땅하고, 패장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감싸 안는 것이 오늘의 우리가 할 일이 아니겠는가.

일제강점기 왕조의 유산이 무참하게 파괴된 것이 어찌 한둘인가. 그런데 대한제국이 자주독립을 위해 몸부림쳤던 유적처럼 철저하게 파괴된 것도 없다. 제국의 법궁이던 경운궁이 그렇고,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항쟁하다가 산화한 영혼들을 위해 지은 장충단이 그렇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즉위식을 거행한 원구단의 처참한 모습이다.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3층 담장을 쌓고, 그 위에 둥근 하늘을 상징하는 황금색 지붕을 세워 놓았으며, 그 옆에 하늘과 땅의 여러 신위들을 모신 3층 팔각지붕의 황궁우를 건설했다. 그런데 자주독립의 상징인 원구단을 일본이 좋아할 리 없다. 그래서 1914년 총독부는 황궁우만 남기고 제단인 원구단을 헐어 그 자리에 철도조선호텔을 지었다. 이때부터 황궁우는 조선호텔 후원의 장식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광복 후 조선호텔은 더욱 우람한 건물로 개축됐다. 그 주변에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서 황궁우가 어디에 있는지, 원구단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호텔을 찾는 인사들은 호텔에서 세운 옛날 정자쯤으로 알 것이다.

▼日 역사왜곡 규탄할 자격 있나 ▼

중국 베이징에는 천자(天子)들의 제천소인 어마어마한 규모의 천단(天壇)이 있다. 만약 침략자가 이것을 헐고 호텔을 지었다면 우리처럼 가만히 두었을까.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안타깝다. 이것이 우리 교육 문화정책의 현주소이고 역사의식이라면 어떻게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규탄할 수 있단 말인가.

일제에 의해 파괴된 문화유산의 복원이 민족정기 회복에 얼마나 중요한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복원공사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그만큼 큰 것이다. 그런데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유적들에 대한 관심은 왜 그토록 무심한지 이해할 수 없다. 일제가 죽인 대한제국을 우리 손으로 다시 죽이는 것이 올바른 역사의식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한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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