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530>黃柑製(황감제)

  • 입력 2003년 2월 9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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柑-감귤 감 稀-드물 희 僻-치우칠 벽

懷-품을 회 薦-바칠 천 農-농사 농

‘物以稀爲貴’(물이희위귀), 萬物(만물)은 드물어야 귀한 법. 중국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속담이다. 그 ‘萬物’의 靈長(영장)인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가뭄에 콩나듯 살았던 옛날 시골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여간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콩나물 시루처럼 살아가는 현대 도시의 삶에서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다이아몬드가 흔하다면 지금처럼 값이 비싸지는 않을 것이다.

귤이 귀했던 옛날,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약 30년 전만 해도 어찌나 귀했던지 좀 窮僻(궁벽)한 시골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값도 좋아서 감귤나무 한 그루만 심어도 자녀 한 명을 대학에 보낼 수가 있다고 하여 ‘대학나무’라고 불렸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의치 못했던 아주 더 옛날이야 오죽 했겠는가.

3세기 초 東漢(동한) 말엽의 陸績(육적)은 孝心으로 유명하여 역대 중국의 대표적인 효자 24명을 뽑은 소위 ‘二十四孝’에 끼일 정도다. 그가 6살 때 九江의 袁術(원술)을 찾아 귤 대접을 받고는 몰래 소매속에 귤을 감춰 어머니에게 드리려다 발각되었다고 하는 ‘懷橘’(회귤)의 고사는 두고두고 효행의 美談(미담)으로 전해져 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귤이 고려시대에는 조정에 바쳐졌던 歲貢品(세공품)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매년 동짓달 濟州(제주)에서 귤과 유자가 진상되면 왕은 宗廟(종묘)에 薦新(천신)하고 측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물론 귤은 고관들의 빈객접대용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니 재배관리도 여간 엄격하지 않아 일부 못된 수령들은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일일이 갯수를 파악하고는 열매마다 꼬리표를 달기도 했다. 감귤이 얼마나 중시되었는지 감귤에 따른 科擧(과거)도 있었다. 즉 明宗19년(1564년)에 처음 시행된 것으로 매년 제주도의 특산물인 감귤이 진상되어 오면 이를 치하하기 위해 成均館(성균관)의 明倫堂(명륜당)에 儒生(유생)들을 모아놓고 감귤을 나누어준 뒤 詩題(시제)를 내려 시험보게 했는데 이를 黃柑製라고 했다.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제도였다.

지금 그 감귤이 ‘시름나무’로 전락되었다. 해마다 생산과잉으로 제 값을 받지 못해 재배농가를 울리고 있는 것이다. 올해도 감귤값이 폭락하여 나무를 베어버리는 현상이 있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같은 일이 매년 반복되는 데도 불구하고 속시원한 조치가 없다는 점이다. 農心(농심)은 갈수록 멍들고 있는데…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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