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만년필]‘성공의 액세서리’ 만년필

  • 입력 2002년 12월 12일 16시 08분


카네기를 기리는 몽블랑의 2002년 한정 생산품. 순은의 소녀 형상이 장식돼있다. 4810개만 제작됐으며 가격은 250만원.
카네기를 기리는 몽블랑의 2002년 한정 생산품. 순은의 소녀 형상이 장식돼있다. 4810개만 제작됐으며 가격은 250만원.
19세기 말 미국 뉴욕의 보험 판매원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은 중요한 계약을 진행하던 도중 낭패를 보게 된다.

고객이 깃털펜으로 서명을 하려는 순간 펜에서 잉크가 떨어져 계약서가 엉망이 된 것. 워터맨이 새 계약서를 가지러 사무실에 다녀온 사이 다른 판매원이 그 계약을 가로챘다.

상심한 워터맨은 잉크가 번지지 않는 펜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렇게 해서 1883년 세상에 첫 선을 보인 게 잉크가 내부에서 흘러나오도록 고안된 만년필이었다. 그 뒤로 만년필은 1세기 이상을 거치며 지식인의 품격을 상징하는 필기구로 자리잡았다.

펠리칸,P570 / 파카, 소네트B 순은체크 /크로스, ATX/펠리칸, M620 스톡홀롬/ 워터맨, 엑스퍼트/ 크로스, 타운젠트706/ 몽블랑, 마이스터스틱 플래티넘P145(위쪽부터)

컴퓨터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만년필은 구세대의 전유물쯤으로 여겨지는 듯 했지만 최근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만년필 전문 인터넷 쇼핑몰 펜샵코리아(penshop.co.kr)의 김경숙 팀장은 “요즘들어 ‘성공한 사람의 액세서리’라는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20, 30대의 젊은 층에서도 고가 만년필 소비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만년필은 특히 선물용으로 인기가 높다. 받는 사람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명품’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제품은 독일제 몽블랑. 새하얀 와이셔츠 주머니에 까만색 몽블랑 만년필을 꽂고 다니는 것은 성공한 사람의 전형처럼 여겨진다.

대표적인 모델로는 ‘마이스터스틱’ 라인과 ‘보헴’ 라인이 있다. 마이스터스틱은 다소 두꺼워 클래식한 느낌이 난다. 2000년 선보인 보헴은 주머니에 꽂는 부분인 클립의 끝을 모조 사파이어, 루비 등으로 장식했다. 우아하고 경쾌해 보여 젊은층에 인기가 높다.

매년 문화예술에 공헌한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한정된 수량으로 제품을 만드는 몽블랑은 올해는 철강왕 카네기에게 헌정하는 제품을 만들었다. 은빛 날개를 펴 뚜껑 전체를 감싸안는 모습의 순은 소녀 조각상을 뚜껑에 새겨넣은 제품.

지금은 프랑스에서 생산하고 있는 워터맨은 역사에 걸맞게 다양한 라인을 갖추고 있다. 창립자의 이름을 딴 ‘에드슨’ 라인이 대표적인 고급 모델에 속한다. 야생마의 이미지를 클립에 옮긴 ‘레탈롱’ 라인과 새끼줄 모양의 순은 손잡이가 특징인 ‘세레니테’ 라인, 창립 100주년 기념 제품인 ‘맨100’ 라인 등도 인기 제품.

미국제 크로스는 지난해부터 클래식 스타일에서 모던한 이미지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금속의 세련된 감각과 검정색의 모던한 느낌이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을 내놓아 젊은 비즈니스맨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창업자 이름을 딴 ‘타운젠트’ 라인과 턱시도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턱시도’ 라인이 주요 제품.

미국제 파카는 1970, 1980년대 졸업 및 입학선물의 대명사였던 브랜드. 낮은 가격대의 제품이 많아 ‘고급’ 이미지가 희석되긴 했지만 여전히 고가 제품에서도 강세를 보이는 브랜드다. 현재 백악관의 공식 펜으로 사용되고 있다.

‘듀오폴드’ 라인은 파카의 대표적인 고가 모델. ‘부인, 캐딜락을 타는 남편께는 이 듀오폴드 만년필이 어울리지 않을까요’라는 광고 카피로 유명하다. 펜촉이 부드러워 필기량이 많은 사람에게 적합한 ‘소네트’, 물방울 보석 모양의 클립이 인상적인 ‘일립스’ 등이 인기 제품.

이탈리아 제품인 오로라는 다른 제품에 비해 조금 더 사각거리는 필기감이 특징. 이 특징에 매료된 마니아들이 있다. 디자인은 화려한 편. 잉크가 떨어질 때를 대비해 A4 용지 3장 정도를 쓸 수 있는 비상용 잉크가 저장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Y’자 모양의 클립에서 이름을 딴 ‘입실론’ 시리즈는 만년필 몸통의 색이 페라리 자동차의 5가지 색상과 같다. 미래지향적이고 창조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만년필 애호가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든 ‘데몬스트레이터 88’은 몸통 전체가 투명하다.

독일제 펠리칸은 크기에 비해 가벼운 것이 장점이다. 가볍고 저장할 수 있는 잉크 양이 많은데다가 필기감이 부드러워 한국에서는 특히 고시 수험생들이 좋아하는 만년필로 알려졌다. ‘톨레도’ 시리즈와 ‘소버린’ 시리즈가 인기.

세계사의 중요한 현장에서 최고 의사 결정권자의 앞에는 늘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1990년 10월 3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 독일이 출범하던 날 서독의 콜 총리와 동독의 메지에르 총리의 손에는 몽블랑이 쥐어져 있었다.

워터맨은 러일전쟁을 종결지은 1905년 포츠머스조약,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 관계를 확정지은 1919년의 베르사유조약을 비준하는 테이블에 올랐다. 1926년 찰스 린드버그는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뒤 감격의 비행일지를 워터맨으로 작성했다.

파카는 1945년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장군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협정에 서명할 때 사용한 만년필이다.

글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사진 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 만년필 구매 및 사용 요령

만년필은 브랜드와 모델에 따라 가격이 10만원 미만에서 100만원 이상까지 천차만별이다.

펜샵코리아와 신세계닷컴(shinsegae.com)의 명품필기구 코너에서는 몽블랑을 뺀 나머지 브랜드의 제품을 오프라인에 비해 20% 할인 판매하고 있다.

만년필로 필기를 할 때 펜촉은 정상인데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필기 스타일과 펜촉의 강도가 맞지 않아 그럴 수 있다. 따라서 만년필을 선택할 때는 몸통의 굵기만 따질 게 아니라 자신이 꾹꾹 눌러서 쓰는 편인가 가볍게 쓰는 편인가를 고려해 맞는 강도의 펜을 고르는 게 좋다.

만년필 사용 때 가장 흔한 고장은 잉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펜심 안의 잉크가 말라서 생긴 잉크 찌꺼기가 잉크 배출구를 막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단순한 증상일 때는 잉크 탱크를 뽑아 놓고 펜촉 부분을 하루 정도 미지근한 물에 담가 뒀다가 쓰면 된다. 장기간 쓰지 않을 때는 잉크 탱크나 카트리지를 분리해 보관한다.

고장 정도가 심하거나 원인을 알 수 없을 때는 매장으로 가져가 애프터서비스를 받는 게 좋다.

전문가가 분해 청소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 섣불리 직접 청소를 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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