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의 테마여행]소설 '죄와 벌' 무대 상트페테르부르크

  • 입력 2002년 12월 5일 16시 11분


도스토예프스키가 즐겨 산책했던 네프스키 대로는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이 있는 궁전광장과 연결된다. 사진 속의 기둥은 알렉산드르 1세 기둥으로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만들어졌다./사진제공 원여행클럽
도스토예프스키가 즐겨 산책했던 네프스키 대로는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이 있는 궁전광장과 연결된다. 사진 속의 기둥은 알렉산드르 1세 기둥으로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만들어졌다./사진제공 원여행클럽
“네거리에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고개를 숙이고 대지에다 입을 맞추세요. 당신은 땅에 대해서도 죄를 범했으니까요.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나는 살인자입니다’라고 외치세요.”

소설 ‘죄와 벌’에서 소냐가 창백한 얼굴로 조용히 내뱉는 말이다. 소냐가 말한 네거리는 바로 센나야 광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 대로인 네프스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러시아 문학이나 영화는 긴긴 겨울밤을 보내기에 좋은 동행이다. 특히 유년기에 고전으로 읽은 ‘죄와 벌’은 러시아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가 되기도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죄와 벌’의 작품 무대로 기억된다.

●분열과 비밀의 문학 세계, 죄와 벌을 만나다

로마노프 왕조의 화려한 궁정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에르미타주국립미술관의 내부 모습/ 사진제공 원여행클럽

어느 도시든 여행을 시작하는 기점이 있기 마련이다. 유럽이라면 주저없이 성당과 광장을 꼽을 것이고 영혼과 사상이 다른 땅이라면 모스크나 사찰, 동상을 꼽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그런 곳이 있다. 이삭 성당. 도시 어디에서도 쉽게 보이는 금빛 큐폴라(돔 지붕)는 제작에 쓰인 금의 무게만 100㎏, 전체 무게가 67t이어서 해마다 몇 ㎜씩 가라앉는다고 한다. 세계 4대 성당 중 하나로 꼽히는 이삭 성당의 위용은 제정 러시아시대에 교회가 지녔던 강력한 권력을 떠올리게 한다. ‘죄와 벌’의 무대는 이 성당 옆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흩어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출생지는 모스크바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846년 발표한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이래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요람 같은 곳이다. ‘죄와 벌’의 경우도 작가는 도시의 중심 대로라 할 수 있는 네프스키 대로를 산책하면서 작품 무대를 구상했다고 한다. 구 해군성에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까지 4.5㎞에 걸쳐 뻗어있는 이 거리는 작가인 고골이 그의 작품 ‘네프스키 대로’에서 “이곳보다 훌륭한 곳은 없다”고 선언하는 등 러시아 작가들의 사랑을 받던 곳이다.

‘죄와 벌’에서 작가는 작품의 무대가 되는 장소들 사이의 거리를 구체적인 걸음 수로 적어놓고 있다. 주인공이 13개의 계단을 내려와 K교란 이름의 다리(고쿠킨 다리)를 통과해서 730보의 걸음을 옮겨 다다르는 노파의 집. 그 집은 지금 림스키 코르사코프(구 에카테린 고프스키) 통로의 모퉁이에 있다. 큰 건물의 104호 집이 바로 고리대금업자인 노파의 집이다.

네프스키 대로에서 자신의 그림을 파는 예술가들. 예술의 도시답게 곳곳에서 이런거리의 화가들을 만날 수 있다./사진제공 원여행클럽

에카테리나 운하의 모퉁이 73호 건물 근처에는 소냐의 집이 있다. 작가는 생전에 20회 이상 집을 옮겼지만 센나야 광장과 가까운 이 모퉁이의 집은 언제나 그의 작품 속 배경이 되었다. 소냐의 집도 사실은 그 자신의 집 중 하나였다. 지금은 개축해서 녹색에서 황색으로 변했다. 센나야 광장이나 경찰서도 아직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특히 네프스키 대로의 뒷길인 쿠즈네츠니가 5번지의 도스토예프스키 기념 박물관은 문학애호가인 여행자들에게는 필수 방문 코스다.

기념관은 그가 1878년부터 말년의 2년간을 보낸 아파트를 개조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완성했고 생을 마감했다. 5층으로 지어진 건물 안에는 6개의 방과 현관, 홀 등이 보존되어 있고 가까운 친구들과 작가의 초상화가 앨범으로 만들어져 있다. 특별히 시선을 끄는 소품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즐겨 애용했던 연초 케이스. 그가 사용하던 서재의 시계는 사망 시각인 8시 38분을 가리키고 있고 책상 위에는 마지막으로 쓴 편지와 약의 처방전이 놓여 있다. 1971년 11월13일 작가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오전 10시30분에서 오후 5시30분까지 개장하고 월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엔 휴무이다.

‘죄와 벌’을 쓰기 시작하던 해는 1865년으로 작가의 나이 44세 때였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에서 가장 지독한 수난의 해였는지도 모른다. 그 전 해인 1864년 4월에는 첫번째 아내 마리아를 잃었고, 6월에는 그의 문학적 수업을 격려했던 형 미하일을 잃었다. 또 12월에는 가장 친한 친구였던 그리고리예프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 간질 발작은 더욱 빈번해졌고 형이 남겨두고 간 유가족과 막대한 부채를 한꺼번에 떠맡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어 도망치듯 독일의 비스바덴으로 떠나야했다.

다시 돌아온 그가 빚에 쫓기며 착수한 소설이 바로 ‘죄와 벌’.

작품 속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세상이 부조리한 것에 격분하고 있다. 가난이라는 죄목 때문에 부당하게 학대 당하는 선량한 시민들이 있는 반면, 사회에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고 기생충과도 같은 고리대금업자 노파가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살인조차 정당하다.

“나는 당신 앞에 엎드린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고통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주인공을 깨닫게 한 여자, 소냐 앞에서의 고백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위대한 연금술사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 대로에서 탄생했다.

거리 곳곳에 남아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 그래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특별한 길 안내자가 존재하는 도시다. 상술이 뛰어난 일본 여행사들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와 만났던 술집, 그의 아파트 등을 그대로 걸어보면서 방문하는 상품까지 만들어 놓았다. 한겨울 오래 전 읽었던 소설 속의 흔적들을 차분히 더듬으면서 걸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것을 느껴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美의 궁전 에르미타주 미술관▼

겨울이면 쇄빙선이 바쁘게 오가는 네바강. 시인 푸쉬킨의 표현처럼 ‘유럽을 향해 열린 창’,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젖줄이다. 도시는 이 강의 델타지역에 형성된 자연섬들, 그리고 운하로 만들어진 섬들 위에 넓게 펼쳐져 세워졌다. 도시를 감싸고 도는 강의 지류만해도 수십개이고 1백개 이상의 섬이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합하면 623개)로 연결된 그야말로 베니스같은 물의 고도(古都)이다.

여름이라면 유람선을 타고 강을 따라 이어진 도시의 풍경들을 탐미하듯 훑어볼 만하다. 러시아 절대왕정을 확립한 표트르 대제(1672∼1725). 그가 이 도시를 만들었다. 발트해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스웨덴이 벌인 북방전쟁(1700∼1721)에서 스웨덴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며 도시가 형성됐다. 그래서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처음 안내하는 곳도 도시의 기원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이다.

요새 안에 있는 성당의 뾰족한 탑은 너무 가파르고 높아서 그 위에 피뢰침을 설치한 이야기가 재미있는 일화로 전해진다. 테르시친이란 이름의 목수가 자청해서 그 일을 마무리했다. 기특하게 여긴 왕은 소원을 물었고 평생 보드카를 마시게 해달라는 그의 소박함에 러시아 전역 어디서나 보드카를 청해 공짜로 마실 수 있는 ‘마패’를 하사했다. 하지만 테르시친이 자주 그 마패를 잃어버리자 왕은 테르시친을 마취한 채 인두로 지져 목 밑에 마패를 새겼다. 잔인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그 덕분에 그는 소원을 이루었고 지금도 이 도시에선 술을 마시자고 할 때 목 밑을 손가락으로 튕긴다고 한다.

요새에서 출발한 도시는 발틱해로 나아가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했다.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에서 초빙한 뛰어난 건축가와 조경사들은 북구의 어느 도시보다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냈다. 그런 까닭에 표트르 대제의 이름과 러시아 정교의 성인인 사도 페트로(베드로)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라 명명됐다. 하지만 왕조가 붕괴된 후 페테르부르크란 이름은 페트로그라드로 개명되고, 1924넌 레닌이 죽자 다시 그를 기념해 레닌그라드로 불리워졌다. 소비에트 정권이 붕괴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원래의 이름을 찾았다.

겨울이면 쇄빙선이 바쁘게 오가는 네바강. 시인 푸슈킨의 표현처럼 ‘유럽을 향해 열린 창’,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젖줄이다. 도시는 이 강의 델타지역에 형성된 자연섬들, 그리고 운하로 만들어진 섬들 위에 넓게 펼쳐져 세워졌다. 도시를 감싸고 도는 강의 지류만해도 수십개이고 100개 이상의 섬이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합하면 623개)로 연결된 그야말로 베니스같은 물의 고도(古都)이다. 여름이라면 유람선을 타고 강을 따라 이어진 도시의 풍경들을 탐미하듯 훑어볼 만하다.

러시아 절대왕정을 확립한 표트르 대제(1672∼1725). 그가 이 도시를 만들었다. 발트해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스웨덴이 벌인 북방전쟁(1700∼1721)에서 스웨덴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며 도시가 형성됐다. 그래서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첫 번째 장소도 도시의 기원인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이다.

요새 안에 있는 성당의 뾰족한 탑은 너무 가파르고 높아서 그 위에 피뢰침을 설치한 이야기가 재미있는 일화로 전해진다. 테르시친이란 이름의 목수가 자청해서 그 일을 마무리했다. 기특하게 여긴 왕은 소원을 물었고 평생 보드카를 마시게 해달라는 그의 소박함에 러시아 전역 어디서나 보드카를 청해 공짜로 마실 수 있는 ‘마패’를 하사했다. 하지만 테르시친이 자주 그 마패를 잃어버리자 왕은 테르시친을 마취시킨 채 인두로 지져 목 밑에 마패를 새겼다. 잔인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그 덕분에 그는 소원을 이루었고 지금도 이 도시에선 술을 마시자고 할 때 목 밑을 손가락으로 튕긴다고 한다.

요새에서 출발한 도시는 발틱해로 나아가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했다.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에서 초빙한 뛰어난 건축가와 조경사들은 북구의 어느 도시보다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냈다. 그 중 백미는 당연히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패권을 잡았던 유럽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에르미타주만큼 전세계 예술품을 골고루 소장한 미술관은 쉽게 찾지 못한다. 외관조차 황금빛과 파스텔 녹색으로 조화를 이뤄 도시 어디에서도 눈에 띄는 바로크 스타일의 기품있는 아름다운 궁전이다. 미술관은 역대 로마노프 왕조의 거처였던 ‘겨울궁전’과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된다. 1000개가 넘는 전시실에 약 250만점에 달하는 전시품. 그래서 완전히 돌아보는데 점당 1분씩 잡아도 5년이 걸린다.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작품 소장을 시작했고 예카테리나 2세가 서구에서 4000점 이상의 회화를 사들여 공간을 메웠다. 전부 3층으로 원시문화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예술품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2층은 가장 인기있는 코너로 마티스의 대작인 ‘댄스’를 볼 수 있다. 모네, 피사로, 고흐, 고갱과 같은 다른 인상파 대가들의 그림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한겨울 미술관을 찾는 러시아 사람들은 입구에 마련된 보관소에 두툼한 털외투를 벗어두고 번호표를 받아든 채 이 놀라운 아름다움의 세계로 빠져든다.

영하 30, 40도를 넘나드는 바깥 추위는 옛 왕조의 화려함에 젖어 넋을 잃은 그 사람들에겐 이미 그다지 중요한 일상이 아니다. 표트르 대제의 이름과 러시아 정교의 성인인 사도 페트로(베드로)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라 명명된 도시.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겐 문학과 예술의 도시로 더 기억될 것 같다.

●여행정보

1. 가는 방법

모스크바까지는 대한항공(수, 일·02-656-2000)과 러시아항공(매주 수, 금, 일·02-777-4200)이 정기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소요시간은 인천출발이 9시간 45분이며 돌아올 때는 기류 때문에 8시간 20분 걸린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국내선을 이용해야한다. 소요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

2. 기타정보

러시아를 여행하려면 입국비자가 필요하다. 러시아 대사관(02-318-2117∼8)문의.

이정현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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