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현각스님 요즘 어떻습니까

  • 입력 2002년 10월 3일 17시 56분


현각스님이 승복을 빨래줄에 널고 있다. 전영한기자
현각스님이 승복을 빨래줄에 널고 있다. 전영한기자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 현각(玄覺·38) 스님을 모처럼 만났다.

작년에 맡았던 경북 영주시 현정사 주지를 올 봄 그만뒀다.

여름에는 규율이 엄격하기로 이름 높은 송광사 선방에서 처음 안거를 했다. 최근에는 9·11테러 1주년에 즈음해 미국을 다녀왔다. 그는 마음이 여리다.

그를 아끼는 법정(法頂) 스님으로부터 그토록 ‘인터뷰하지 말고 자기 관리에 신경쓰라’는 말을 듣고도 두번 세번 찾아오는 기자를 매정하게 뿌리치지는 못한다.》

9월 30일 서울 수유동 화계사로 찾아갔을 때 현각스님은 시골 아줌마처럼 큰 플라스틱 대야를 머리에 이고 대웅전 앞 요사채를 돌아서고 있었다. 따라가 보니 대야에는 빨래를 막 끝낸 젖은 승복이 담겨있었다.

“풀은 쑤었는데….”

그는 승복에 풀을 먹이는 작업을 하려고 했나 보다. 그러나 날씨가 흐려 풀을 쑤어놓은 채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풀을 쑤다’는 어려운 한국말을 그는 알고 있다. 풀을 먹여 말린 옷의 산뜻한 촉감을 좋아할 정도가 됐으니 한국인이 다 된 것 같다. 조계종의 비구승려가 된 것이 1996년. 벌써 한국스님 생활이 8년째인 그는 “이제 법적으로도 한국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6년인가 7년인가 그 이상 한국에 거주하면 영주권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다. 중간에 한번 장기간 미국의 선센터 운영을 맡아 나가 있어서 그 기간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궁금하다. 이것만 문제되지 않는다면 빨리 한국인이 되고 싶다. 매년 한 번씩 출입국관리소에 신고하러 다니는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그는 어찌 보면 불교보다 한국이 좋은 사람 같다.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방불교의 위파사나 수행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위파사나와 한국불교의 참선도 마찬가지”라며 “다만 남방불교는 조밀하면서 군색해 보이는 데 비해 한국불교는 기운과 열정이 있어 스타일이 내게 맞다”고 말했다.

현각 스님은 화계사 조실인 숭산(崇山) 스님의 제자다. 숭산 스님 밑에는 많은 외국인 스님이 있다. 이들은 주로 화계사 국제선원이나 화계사 말사인 무상사 국제선원에서 자기들끼리 수행해 왔다. 숭산 스님은 요즘 ‘킥 아웃(kick out)’을 하고 있다. 현각 스님처럼 한국말도 잘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포교할 생각이 없는 스님의 경우에는 독립을 권하고 있다. 현각 스님이 작년 현정사 주지를 맡았던 것이나, 화계사 국제선원장을 오래한 무심(無心) 스님이 최근 부산에서 포교당을 개척하고자 나가 있는 것이 다 그런 이유에서다.

현정사가 비록 새로 생긴 사찰이긴 하지만 현각 스님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내 절의 주지가 돼 큰 관심을 끌었는데 사판(事判·행정) 일이 잘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판과 이판(理判·수행)을 같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수행쪽이 많이 약해졌다. 역시 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가난해도 외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창건주 보살님도 신경을 많이 써주고 나도 힘써 노력했지만 수행을 보다 잘하기 위해서 주지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현정사 주지를 그만뒀다는 얘기를 뒤늦게 전해듣고 현각 스님을 한번 만나보려 했으나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지난 여름 전남 순천 송광사에 들렀는데 스님이 이곳 선원에서 하안거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안거가 끝나는 날 송광사로 찾아가 잠깐 만났다.

현각 스님은 그동안 15번의 안거를 했지만 송광사 안거는 처음이었다. 총림 중에서는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는 해인사 선원도 유명하지만 그곳은 텃세가 세 아직 외국인 스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송광사는 과거 구산(九山) 스님 아래 외국인 스님들이 많이 거주해 외국인에 대해 개방적이다.그러나 이번 안거중 선방의 외국인 스님은 그뿐이었다.

“외국인 스님들과 함께 안거할 때보다 많이 외로웠다. 선방 스님들 중에는 사투리를 쓰는 사람도 많아 한국말을 알아듣기 힘들었고 미국을 좋아하는 스님, 싫어하는 스님 등 성향도 다양했다. 여기서도 역시 수행은 혼자서 외롭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현각 스님은 현재 무심 스님이 자리를 비운 화계사 국제선원의 일을 돕고 있다. 그는 최근 미국을 다녀왔다. 9·11 테러 1주년을 맞아 뉴욕에서 천도재(薦度齋)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천도재는 세계무역센터빌딩터 인근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9월 10일 열렸다. 미국인, 한국인, 일본인 스님 등이 함께 모여 죽은 이들의 영혼을 기리는 자리였는데 그는 미국인 스님 자격으로 참석했다.

현각 스님은 9·11 테러를 가까이서 체험한 바 있다. 그는 당시 한국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뉴욕 JFK 공항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갑자기 ‘착륙이 힘들다’는 기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탄 비행기는 급작스럽게 항로를 바꿔 미니애폴리스로 향했다. 그곳 공항호텔에 3일간을 머물면서 TV를 통해 9·11 테러소식을 들었다.

현각 스님은 이번 미국 방문 중 미국인들이 무슨 얘기를 하든 끝날 때쯤엔 결국 9·11 테러 얘기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 같은 미국인의 정신적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반에서 몸도 가장 크고 힘도 가장 좋은 친구가 작은 녀석에게 한방 얻어맞았는데 그걸 보고 웃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고소하다’ ‘당연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랄까. 그날 테러는 미국인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미국인들은 그 상처를 아직 정신적으로 소화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강한 모습을 보여 자부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현각 스님은 쌍둥이 빌딩에 관한 어릴 적 기억을 들려줬다. 그는 뉴저지주에 살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뉴욕에 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집까지는 2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갈 때 아버지께 늘 ‘언제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도착해요’라고 물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쌍둥이 빌딩이 보이니’라고 되물었다. 어린 꼬마는 차창 밖으로 조그맣게 보이던 쌍둥이 빌딩이 점점 더 커지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쌍둥이 빌딩은 그만큼 많은 미국인의 정신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9·11은 거룩한 날이 되고 미국은 종교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이라크를 치겠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소명을 받아 전쟁을 치르는 십자군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레이트 나이트(Late Night)’라는 TV쇼를 보니 그런 부시 대통령을 두고 ‘성 조지(St. George)’라고 부르기도 했다.”

천도재 다음날 그는 홀로 세계무역센터 빌딩터로 찾아갔다. 뉴욕은 이날 아침 ‘침묵’으로 9·11을 되새겼다. 늘 소란스럽기만 하던 뉴욕의 아침이 이날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휴대전화로 시끄럽게 통화하는 증권맨도 없었고 자동차 경적을 요란하게 울리며 지나가는 흑인도 없었다. 아침 8시 46분, 정확히 세계무역센터가 첫 공격을 받던 그 시간 그는 그곳에서 “불안한 종교적 분위기를 느꼈다”고 말했다.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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