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김호기 교수, '이념의 지도'로 지식인 現주소 밝힌다

  • 입력 2002년 8월 13일 18시 56분


김호기 교수
김호기 교수
보수와 진보의 논란이 끊이지 않는 한국사회 지식인들의 이념적 분류도가 새로이 제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사회학)는 16일 출간예정인 저서 ‘말, 권력, 지식인’(아르케)에서 대표적 지식인 12명의 이념적 성향을 진보, 중도, 보수로 분류하고 그들의 삶과 사상을 조명했다. 이 내용은 월간지 ‘신동아’(2001년 10∼12월호)에 발표된 것을 이번에 수정보완한 것이다.

김 교수의 이번 시도는 2000년에 처음으로 현대한국 지식인 60여 명의 이념 지도를 작성해 화제가 됐던 윤건차 교수(일본 가나가와대·神奈川大·사상사)의 저서 ‘현대한국의 사상흐름’(당대)에 이어 두 번째. 윤 교수의 저서에서 김 교수는 ‘좌파적 시민사회론자’로 분류됐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진보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인간주의적으로 조명한’ 신영복(성공회대·경제학), ‘진보적 민족주의자’ 강만길(상지대 총장·한국사), ‘신좌파적 정치이론가’ 손호철(서강대·정치학), ‘진보적 시민운동론자’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사회학) 등 네 명. 좌파의 신흥 메카로 떠오른 성공회대 교수가 두 명이나 포함돼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중도주의 지식인으로는 ‘중민(中民)론자’ 한상진(서울대·사회학), ‘자유적 이성주의자’ 김우창(고려대·영문학), ‘미시적 케인즈주의자’ 정운찬(서울대총장·경제학), ‘민주적 시장경제론자’ 최장집 교수(고려대·정치학)를 지목했다. 김대중 정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최 교수와 현(現)위원장인 한 교수가 동시에 지목된 것은 현정부에 대한 평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는 ‘보수주의와 전통사상을 결합한’ 송복 교수(연세대·사회학), ‘보수적 국제관계론자’ 이상우(서강대·정치학), ‘유교민주주의론자’ 함재봉 교수(연세대·정치학), ‘보수주의 통일론자’ 이동복 객원교수(명지대)를 들었다. 함 교수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 신문기자 출신이란 점이 그들의 현실주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쳤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의 분석은 윤 건차 교수의 지식인 지도와 대체적으로 유사하지만 개별 이념과 지식인에 대한 세부 분류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먼저 김 교수가 중도주의로 묶은 지식인들을 윤 교수는 중도주의 우파(개량적 자유주의)와 좌파(진보적 자유주의)로 나누고 있다. 또한 윤 교수 책이 진보주의에 대한 분석에 주력한다면, 김교수 책은 진보, 중도, 보수에 대한 전체적 분석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해 김교수는 “상세한 이념 지도를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념 구도를 객관적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자신의 분류에 대한 과도한 해석이나 의미 부여에 대해서는 적잖이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하지만 이념의 선택은 특히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지식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문제. 지난 50여 년간 분단현실과 ‘압축적 산업화’ 과정에서 이념은 지식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정신적 보루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김 교수의 분석은 최초로 국내 학자에 의해 우리 지식인의 이념적 현주소를 점검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만 동시대 선배 지식인들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아서인지 비판에는 다소 관대한 편이다.

그렇다면 저자인 김 교수는 이 이념 구도 중 어디에 속할까. 이수훈 교수(경남대·사회학)는 김 교수를 ‘현실주의적 진보주의자’로, 조대엽 교수(고려대·사회학)는 ‘중도적 진보’라고 평가한다. 한편 작년 10월 김 교수는 윤건차 교수와의 대담에서 자신을 ‘비판적 시민사회론자’로 분류한 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 교수는 조희연 교수와 한상진 교수 사이에 위치하는 ‘진보적 중도주의’에 가깝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책 후기에 대한 K기자의 공개답신

《김호기 교수는 저서 ‘말, 권력, 지식인’의 맨 뒤에 ‘K 기자’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후기 ‘여의도, 선셋 대로, 콜레라 시대의 지식인’을 실었다. 그 안에는 K 기자와 나눴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국사회 지식인으로서의 고뇌가 담겨 있다. K기자는 동아일보 학술담당 전문기자인 김형찬박사(동양철학). 그의 공개 답신을 싣는다.》

김형찬 기자

김 교수께,

새 책을 내시게 됐다니 축하드립니다.

지난 봄 인사동에서였던가요? 비가 축축이 내리던 그 날, 그 동안 연구한 것을 몇 권의 책으로 정리한 후 시민단체 일에 전념하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곳이 ‘마음의 고향’이시라구요.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고민하는 김 교수를 멀리서나마 지켜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함께 꿈꿔 왔던 것은 자율과 연대가 넘실대는 이성적인 시민사회였지요.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으면 양쪽으로부터 모두 격렬히 비난받는 20세기적 이념 구도에 여전히 갇혀 있는 듯합니다.

이번 저서는 바로 한국 지식인 사회의 이 답답한 현실에 대한 김 교수 나름의 고민을 정리해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 교수의 평가를 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 보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지식인의 이념적 성향에 대한 분류는 진보, 중도, 보수의 분류기준 이전에 자신의 학문적 이념과 실천이 일치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미 실천의 영역에서 이념보다 권력이나 헛된 명망을 좇아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물론 모순투성이의 존재인 인간의 모든 주장과 행동에 대해 이념적 일관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때로는 이념으로는 설명되기 곤란한 ‘인간적 고뇌’의 상황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래서 이론과 실천의 철저한 상호작용을 요구하는 ‘지식인’이란 이름이 더욱 무거운 것 아니겠습니까.

외람된 소리를 하고 나니 제 자신부터 돌아보게 됩니다.

비가 갠답니다. 밝은 햇살 비치는 창가에서 차 한 잔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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