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1012' 프리틴]'질'은 '당장 꺼져줘'입니다

  • 입력 2002년 7월 18일 16시 06분


학교도서관에서 전자책 사용법을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동아일보자료사진]
학교도서관에서 전자책 사용법을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
[동아일보자료사진]
12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 초등학교의 6학년 수업시간. 조용하게 수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생들 사이에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이 진행되고 있다.

한 학생이 귀 주위에 손을 살짝 올리고 건너편의 또 다른 학생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몇 차례 까딱거린다. 주위 학생들이 힐끔 쳐다보지만 ‘암호로 무슨 얘기를 하나보다’고 생각할 뿐,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 쉬는 시간이면 ‘소리없는 잡담’은 더 커진다. 마음에 안 드는 급우 옆에 갑자기 다가가서 암호가 통하는 친구들끼리만 몸짓과 손짓을 써가며 보란 듯이 ‘대화’를 나눈다.

이 학교 학생들에게 최근 초등학교 5,6학년의 유행어를 묻자 일제히 손가락질을 하며 “질!”이라고 외쳤다. 당황하는 기자에게 학생들은 “온라인 게임에 나오는 용어”라고 설명했다. 인터넷 온라인게임 ‘크레이지 아케이드’에 등장하는 용어로 ‘당장 눈앞에서 꺼지라’는 뜻이라는 것.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또 다른 ‘꺼지라’는 표현인 ‘앵’은 사용하는 아이들도 그 출처를 몰랐다.

이 학교의 김모양과 선우모양은 5학년 때인 지난해 둘만의 ‘교환 비밀일기’를 썼다. 김양이 한 페이지를 쓰면 그 다음날은 한 페이지를 선우양이 쓰는 방식이었다. 두 사람은 “그저 학교나 가정생활의 느낌을 적었을 뿐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어쨌든 부모님과 교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둘만의 비밀이었다.

초등학교 6년생의 비밀일기를 교실에서 압수해 들춰본 경험이 있는 인덕연 교사(경기 이포초교)는 그에 관해 혀를 내두른다.

“노트를 아무리 읽어보아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둘만이 알 수 있는 기호로 일기를 썼으니까요. ‘아, 얘들은 다른 애들이구나’라고 느꼈죠.”

또래집단끼리만 아는 은어를 썼던 것은 프리틴의 부모세대도 경험했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프리틴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다른 것은 그 또래집단의 언어가 아주 가까운 두세 사람 사이에서만 통할 만큼 세분화했고 폐쇄적이라는 점이다.

왜 아이들은 ‘비밀’을 즐기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신이 속해 있는 ‘또래 집단’을 유지하는 행위”라고 분석한다.

발달심리학적으로 ‘또래 관계’가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시기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소년기에 접어드는 만 13, 14세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만 10∼12세로 당겨지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생과 고학년생을 뚜렷이 구분하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교육계 일각에서 더 이상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기존 학제가 학생들의 의식과 실질적인 지적 능력, 감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비밀일기, 교환일기를 쓰는 학생들은 점차 줄고 있다. 대신 인터넷 접속과 동시에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버디버디’나 인터넷 e메일 등을 통해 서로 비밀을 나눈다. 인터넷 채팅이나 커뮤니티를 통해 온라인으로만 친구를 사귀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오프라인으로까지 만남을 연장하는 일은 드물다.

인터넷에서 전하는 쪽지는 짧다. 온라인의 짧은 대화문화는 오프라인으로까지 확대돼 교실에서 서로 주고받는 쪽지도 점점 더 단순해진다.

글이 짧아진 대신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점점 더 멀티미디어화하고 있다. 채팅을 하며 자신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첨부해서 올리는 프리틴도 적지 않다. 초등학교 5, 6학년생 상당수가 기업 사무실에서 프리젠테이션 프로그램으로 주로 쓰는 MS파워포인트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는다.

비밀 교환일기를 써왔던 김모양은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같은 또래 초등학생들이 소설을 마음대로 쓰고 예쁜 그림과 그래픽을 배경무늬로 만들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현실세계에서 김모양은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회원 8명에 불과하나 하나의 조직을 이끌어가는 수장(首長)이다. 김양과 함께 교환비밀일기를 썼던 선우양도 최근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 달라는 메일을 줄기차게 받고 있다. 온라인세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간다는 것은 프리틴들에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박현진기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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