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발간 24년만에 150쇄 '난쏘공'을 아십니까

  • 입력 2002년 6월 14일 18시 36분


작가 조세희씨
작가 조세희씨
《1970∼1980년대 ‘한국 대학생과 지식인의 필독서’였던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성과힘)이 10일로 150쇄를 기록했다.

1978년 처음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판매된 부수는 모두 60만5500부.‘난쏘공’이라는 약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소설은 1970년대말 화려하게 성장한 도시의 뒷골목에 시선을 고정한다. 작가 조세희(60)씨가 난쟁이 일가를 통해 산업화의 부작용과 경제적 불평등에 떠밀려가는 도시빈민의 그늘진 삶을 간결한 문체로 담아낸 ‘문제작’이다.》

인사동에서

“‘난쏘공’ 150쇄를 맞아 그저 후배(기자)들과 밥 한끼 먹고 싶었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만난 조씨는 “이런 자리는 앞으로 없을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며 얘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조씨는 한사코 언론과의 접촉을 꺼려왔다.

“문학작품이 24년을 두고 150쇄를 찍어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못난 사람이 나이만 먹는다’고, 150쇄가 절대로 자랑은 아닙니다. 요즘 섹스를 소재로 한 젊은 작가의 소설이 한달에 70∼80만부가 팔리기도 한다지요. 나는 ‘실패한 작가’의 전형이예요.”

둔촌동 그의 집 앞에서

지난달 하순 어느날 아침, 기자는 서울 강동구 둔촌동 조씨의 자택을 불쑥 찾아갔다. ‘난쏘공’ 150쇄 발간과 그가 ‘작가세계’에 연재했다 91년 중단한 장편 ‘하얀저고리’를 마무리해 출간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취재욕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작품이외의 얘기를 하지 않는 작가가 쉽게 기자를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혹시나’하는 기대를 갖고 달랑 주소 하나 만을 들고 무작정 찾아 나선 것이었다.

70년대풍의 옛 주공아파트 단지에는 5월의 아침햇살이 충만했다.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린지 두어시간. 인쇄물로만 접했던 그가 불쑥 모퉁이를 돌아나왔다. 어렵게 전화통화가 된 그는 기자가 집 앞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부랴부랴 외출 차비를 한 듯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려던 길이었어요. 수전증이 와 손으로 글을 쓰기 힘들었는데, 지인(知人)이 노트북을 가져와 요즘은 이것으로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난쏘공이 150쇄가 되는 6월에는 내가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장편 ‘하얀저고리’는 출판사와의 약속도 있고 해서 빨리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언제 나올 것인지 정확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는 “특별히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며 이어지는 질문을 잘랐다.

기자를 지하철역까지 차로 데려다 주겠다던 그는 “미안해서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다”고 중간에 잠시 차를 멈추더니 슈퍼마켓에 들러 과일주스를 사왔다.

“요즘 누가 ‘조세희’를 알겠어요. 그런데 가끔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휙 지나갔던 젊은 학생이 다시 돌아와 ‘혹시 난쏘공의 조세희씨 아니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럼, ‘너희 부모세대가 읽었던 책인데 기억하느냐’고 하지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가슴 속에 ‘따뜻함’과 ‘슬픔’이, 교집합을 나타내는 벤다이어그램처럼 겹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기자에게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주던 그의 모습이 그 후로도 한참동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인사동에서

“‘난쏘공’의 150쇄는 조세희의 절규에 대해 받은 일종의 ‘동의’ 같습니다.”

진실한 ‘절규’를 모았을 때 ‘역사’가 된다는 설명.

그는 작가가 될 때 “3000장 이상 쓰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3000장이면 작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털어 넣을 수 있어요. 그렇지 못하다면, 서툴거나 다른 욕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쏘공’이 1300장이었거든요. 3000장의 나머지가 장편 ‘하얀저고리’지요. ‘하얀저고리’는 또 다른 절규입니다. ‘난쏘공’에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담았는데, 현대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세계사가 출간을 준비중인 ‘하얀저고리’는 조선조 후기 농민반란을 이끈 노비 섣달쇠와 그 부인 아침이의 이야기가 한 축을, 그 후손으로 80년 5월 광주항쟁에 적극 참여한 영희네 가족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같은 선상에 배열된 이 두 이야기는 맞닿아, 소수의 기득권층이 힘없는 다수의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한다는 ‘역사적 일관성’을 보여준다.

“구로동에 강의를 간 적이 있어요. 강의가 끝난 뒤 핏기없는 어느 여자애가, 오래 갖고 있어 시든 꽃과 손에 꼭 쥐고 있어 온기가 가시지 않은 십자가를 제 손에 쥐어 주었죠. 제가 쓰는 글은 이 아이와의 약속이예요. ‘왜 이런 현실을 보고, 가만히 계세요. 글을 써주세요’라고 얘기하는 노동자와의 약속이예요.”

그러나 ‘하얀저고리’ 연재를 중단한 뒤 그는 10년이 넘도록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 이유는 “남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스스로 ‘가슴 찡하고, 따뜻한 세상 이야기구나’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책을 낼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마치 ‘문학적 유언’처럼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내 아들에게 전화 한통만 해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고 한 마디만 해준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습니다”라며 빙긋이 웃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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