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옷 아닌 브랜드를 판다

  • 입력 2002년 5월 14일 17시 46분


신세계백화점 서울 본점의 ‘타임’ 매장은 이 백화점에 입점한 다른 여성복 매장보다 3배나 넓다.

백화점의 여성복 매장에서는 네 군데의 ‘코너’가 명당으로 꼽힌다. 붐비지 않아 고급 이미지를 유지하기 좋고, 벽이 두 면이라 전시하기도 편하기 때문. 현대백화점 서울 본점 여성복 층의 명당 중 2곳은 ‘타임’과 ‘마인’ 매장이다. 둘 다 여성 의류업체 ‘한섬’의 브랜드다.

▼‘타임’등 매출-순익 쑥쑥▼

외환위기로 대형 의류업체가 줄줄이 쓰러질 때도 한섬은 매출이 줄지 않았다. 특히 타임은 각 백화점에서 여성복 매출 1위를 달리는 데다, 구매력 있는 고정 고객이 70% 이상이어서 백화점들이 ‘예우’하는 브랜드이다.

전문가들은 한섬의 성공 비결을 ‘타임의 옷’이 아닌 ‘타임 브랜드’를 판매하는 상품 기획력과 브랜드 관리력에서 찾는다. 대형 업체들이 할부 카드를 남발하고 정기세일 결산세일 고별세일 등 갖가지 이름의 세일을 해가며 외형 경쟁을 벌일 때 디자인 브랜드 고객관리를 했다는 것.

법정관리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갔던 여성복 ‘빅3’업체인 신원 나산 대현 등도 ‘한섬 방식’으로 기업 체질을 바꿔 재기에 성공했다. 대현은 작년 말 워크아웃을 졸업했고 신원과 나산도 워크아웃과 법정관리 졸업을 앞두고 있다.

▼매일 판매 반응 체크▼

▽팔릴 제품을 팔릴 만큼만 만든다〓한섬은 매주 1회 사내 제품 품평회를 연다. 디자인된 것 중 30%만 남고 나머지는 탈락한다. 30%의 제품은 소량씩 샘플을 제작해 전국 매장에서 시범 판매한다. 매일 올라오는 반응에 따라 추가생산 여부와 특정 지역에서만 광고를 할지, 전국 기획상품으로 할지 등을 정한다. ‘반응생산 시스템’(QR·Quick Response)이다.

상품 기획은 통상 1주일 단위로 이뤄진다. 한섬에는 디자이너, 소재 전문가, 색상 전문가 등 의류 기획 관련 인력이 100여명에 이른다.

97년 이전만 해도 대부분 업체들의 ‘상품 기획’은 소비자 반응을 고려하기보다 업체가 정형화된 스타일을 제시하는 식이었다. 상품 기획은 월 단위나 시즌 단위로 하고 소비자 반응이 좋지 않으면 세일로 재고 조정을 했다.

최근에는 QR가 의류업계 전반에 도입되고 있다. 대현 경영관리실의 이원재 과장은 “예전에는 70% 물량을 미리 정하고 30%만 반응에 따라 추가생산 여부를 결정했다면 이제는 그 비율이 반대”라고 설명했다.

▽브랜드 망치는 ‘떨이 장사’ 안 한다〓의류는 유행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므로 재고가 큰 위험요소다. 따라서 ‘정상가’ 판매율이 의류업체 수익성의 관건이다.

타임은 1년 내내 세일을 하지 않는다. 한섬의 다른 브랜드는 1년에 2번만 백화점 세일에 참여한다. 세일 상품은 이후 바로 매장에서 철수시킨다. 이월상품을 판매하는 아웃렛 매장도 ‘떨이’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해 백화점 매장과 비슷한 인테리어를 했다. 통상 의류업체의 ‘떨이’는 할인율이 약 80%나 됐지만 한섬은 아웃렛에서도 50% 이상 할인하지 않는다.

QR로 재고 자체가 많지 않은 것도 세일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비결 중 하나다. 과거에는 의류업체들 사이에 ‘30%는 안 팔리는 물량, 나머지 70% 중 3분의 1은 정상가, 3분의 1은 세일, 3분의 1은 원가 이하’가 ‘공식’이었다. ‘정상가’도 어차피 재고가 쌓일 것을 감안해 ‘정상보다 높은’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정상가 판매 중심’ 정책이 확대되고 있다. ‘상품력’이 있어 재고라도 어느 정도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에 원가 이하의 ‘눈물 세일’은 하지 않는다.

▽‘영업력’보다 ‘기획력’과 ‘브랜드력’〓수시 기획, 반응 생산이 확산되면서 각 업체의 기획, 디자인 수준이 드러나게 됐다. 밀어내기식 영업력보다 기획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것.

▼영업보다 기획에 승부▼

외환위기 전에는 외형 확대 경쟁이 심해 대형업체들이 회원카드를 발급해 6개월 무이자 할부 결제를 해주고 명동 등 중심 상권에 막대한 부동산 비용을 들여 직영점을 내는 등 ‘출혈 영업’을 해왔던 것이 사실. 높은 마진을 붙여도 수익이 디자인에 투자되지 않고 영업비용을 메우는 데 쓰였던 셈이다.

최근 의류업체들은 국내외 패션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이고 분석하는 별도 정보팀을 두고 디자이너 연봉을 올려주는 등 기획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삼성패션연구소의 이유순 수석연구원은 “아직 국내 의류업체의 규모가 작고 해외 진출이 미미하지만 시장의 변화에 맞게 상품 기획과 브랜드 마케팅력을 키워간다면 한국 패션산업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여성복 업체 실적 추이 (단위:억원)
 대표 브랜드1998199920002001
한섬SJ, 시스템매출액 604
영업이익 91
934
177
1154
252
1362
321
타임
아이엔씨
타임214
38
311
62
387
83
438
95
신원씨, 베스띠밸리4890
270
4165
210
5229
364
5017
389
대현블루페페, 주크, 모조에스핀1459
-172
1572
210
1474
96
1623
276
나산조이너스,
꼼빠니아
851
-599
1013
2
1385
326
1613
404

타임아이엔씨는 한섬의 계열사.
자료:대신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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