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B]한국도 알고 외국도 알고 "우린 코스모크라츠"

  • 입력 2002년 2월 28일 14시 03분


왼쪽부터 우주현, 백영욱, 이미영씨
왼쪽부터 우주현, 백영욱, 이미영씨
혈통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여러 나라에 체류하며 문화와 언어를 습득한 사람을 일컬어 ‘코스모크라츠(cosmocrats)’라 한다. 국경 없이 일하는 다국적 미디어, 컨설팅회사, 법률회사 등이 늘면서 이들의 활약상이 주목받고 있다.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고 한국에서 고교시절의 일부와 대학시절을 보내 한국적인 학연과 인맥이 형성된 특례입학자들. ‘한국형 코스모크라츠’로 분류될 수 있는 이들의 생존능력은 세계화를 타고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출될까.

▼'광고맨' 백영욱씨

백영욱씨(27·LG애드 대리)는 해외에서 방영될 국내기업 광고를 제작하거나 배스킨 라빈스, 마이크로 소프트 등 다국적 기업의 한국판 광고를 만드는 쌍방향성 카피라이터 겸 프로듀서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카메룬 캐나다 인도 말레이시아 미국을 거쳐 고교 1학년 때 서울로 와서 연세대 신문방송학과에 특례입학했다. 지금도 해외업무를 맡고 있어 1년에 3개월은 외국에서 생활한다. 외교관인 아버지는 고교 재학시절 미국에 남으려던 그에게 “아무리 외국에서 오래 살아도 결국엔 동양계고 한국인이다. 우선 ‘한국적 백 그라운드’를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 좋다”고 그를 설득했다.

고교와 대학을 거치며 그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단련했고 집단생활과 보수적 사고방식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몸가짐을 익혔다. 그는 “외국인들과 일할 때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선입관을 주면 외국인들이 그것을 감안하고 협상하려 든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협상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갈 여지가 많아진다”고 말한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그에게는 ‘다국적 영어’도 경쟁력이다. “줄곧 국제학교를 다닌 덕분에 억양이나 어휘 선택이 조금씩 다른 인도식, 중국식, 프랑스식, 영국식, 한국식 영어를 수월하게 구사할 수 있다. 그것이 각국의 사람들과 더 친밀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해 LG전자의 미주 유럽 중동시장 광고의 진행과 카피라이팅을 주로 담당했다. 유럽지역의 경우 광고가 에어컨 매출 50% 신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부터 LG전자의 중국시장용 광고제작에 투입되는 그는 “한국과 문화적 코드가 비슷한 중국에서는 ‘한국적인 광고’가 소비자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고 있다”면서 “그래서 ‘한국적 사고방식’을 잘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경영컨설턴트 이미영씨

경영 컨설턴트 이미영씨(30)를 만나는 1시간 동안 그를 찾는 휴대전화는 여러번 울려댔고 ‘공식적인 내용’으로 짐작되는 통화가 수차례 이어졌다.

이런 바쁜 생활을 ‘내심’ 즐기고 있는 듯 보이는 이씨는 현재 매니지먼트 컨설팅 부문 세계 5위권의 외국계 경영컨설팅 회사 에이티커니(A T Kearney)의 한국 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사내 평가에서도 ‘슈피리어(supe-rior)’급을 받을 정도로 인정을 받는 그는 91년 특례입학자로 연세대 응용통계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94년 12월부터 LG전자 정보전략추진실에서 3년 반 동안 근무한 뒤 미국 UC버클리대에서 MBA가 됐다.

이씨는 외국 기업이 클라이언트가 되어 국내 기업의 인수, 합병을 추진할 때나 국내 기업이 해외진출 관련 중단기 경영전략을 수립할 때 컨설팅을 해 주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외국에 나가지 않는 경우라도 외국인들과 외국 관련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이씨의 경쟁력은 어느 사회에 살고 있은지 간에 그 체제 내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점.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미국 워싱턴DC 근교의 미국 학교를 다니면서 기를 쓰고 영어를 따라잡아 평균 A의 성적을 받았다. 연세대 재학 시절에도 4.0만점에 평점 3.7의 성적으로 다섯 차례나 장학금을 받았다. 그래선지 숨기지는 않았지만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가 ‘특례 출신’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해외 체류 경험 자체가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죠. 하지만 한국을 떠나 외국 생활을 하다보니 세상을 보는 시야가 조금 넓어졌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질적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생존 경쟁’을 하다보면 조금은 더 강인한 정신과 생명력을 갖출 수 있지 않겠어요?”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동시통역사 우주현씨

국내 대기업 및 공공기관의 국제회의전문 프리랜서 동시통역사로 근무하고 있는 우주현씨(30).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에서 중, 고등학교를 마쳤고 특례전형으로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국내 남성복 패션브랜드에 취직해 2년여간 디자이너로 일했다. 하지만 한 손에 포트폴리오를 들고 클라이언트들과 함께 바삐 거리를 걷는 활동적인 직업을 상상했던 그로서는 창의적인 디자인을 구상하는 시간보다 상사의 지시에 따라 하루하루를 움직여야 하는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가진 경쟁력이 뭘까’ 심사숙고한 끝에 한국외국어대 동시통역대학원에 입학했고 입학보다 졸업이 더 힘들다는 학업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동시통역사로서의 첫 직장은 경영 컨설팅 전문업체인 매킨지였다. 8개월간 경험을 쌓은 뒤 다시 한번 프리랜서로 독립하는 모험을 했다. 현재까지는 보수와 자기 만족도가 모두 높다.

이제 겨우 2년차지만 고정고객이 적지 않다. 우씨의 외국 거주 경험은 클라이언트들에게 실력을 믿을 수 있는 매력적인 배경으로 작용한다.

“실력면에서는 국내파 통역사들과 해외파들간에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특히 금융, 경영 관련 프리젠테이션 등 섬세하게 통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맡길 때는 순발력의 기준으로 여겨서인지 업무 의뢰 전에 해외 거주 경험 여부를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무 기반은 한국이지만 클라이언트들의 수행 통역 겸 현지 회의 통역을 위해 해외출장에 나서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앞으로 국제 경제나 경영 관련 학위를 따는 것이 ‘중장기 과제’. “이제는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이 내가 가진 경쟁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닿았다”고 우씨는 힘주어 말했다.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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