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몸이 계급이다"

  • 입력 2002년 2월 21일 14시 05분


배 나오면 배고프고, 배 들어가면 배부르다?

몸이 '계급'인 사회. 고소득 고학력일수록 몸이 점점 '얇아지고' 있다. 미국에서도 피부색과 계층별로 체지방 비율에 큰 차이가 난다. 살빼기와 운동이 중요한 관심사가 된지 오래지만 보건복지부 통계는 한국 성인 3명 중 1명이 비만임을 보여준다.

체지방의 경제학, 체지방의 사회학, 이 시대 계층코드로서의 몸을 들여다본다.

김영수씨와 이철민씨(둘 다 가명)는 65년생 뱀띠.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사무직 종사자다.

그러나 두 사람을 37세 동갑내기로 보는 사람은 없다. 배 주위에 두둑한 술살이 찐 이씨는 일찌감치 중년에 들어선 남성의 퍼진 몸이다. 이에 비해 약간 마른 듯 단단한 체형의 김씨는 눈가의 주름만 아니면 사회 초년생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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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만 다른 것이 아니다. 석사 학위 소지자인 김씨는 외국계 회사의 사업담당 이사로 연봉이 1억5000만원선. 서울 강남의 호텔 피트니스 클럽에서 매일 아침 30분간 몸을 만든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골프장을 찾는다. 과식하지 않고 기름기 많은 음식은 피하며 과일은 꼭 챙겨 먹는다. 요즘엔 유기농 야채에 맛을 들였다.

연봉이 3000만원을 약간 웃도는 이씨는 대기업의 과장으로 운동을 해 본 기억이 없다.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 때는 늘 소주 1, 2잔을 반주로 마신다. 주 3, 4회는 저녁 회식자리에서 삼겹살에 소주 1병을 비운다. 배를 채우고 인간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할 뿐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는 이 과장의 관심사가 아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 성인 3명 중 1명이 비만이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비만이 영양결핍을 밀어내고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생활이 윤택한 사람이 뚱뚱해지는 것이 아니다.

김 이사와 이 과장의 예에서 보듯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거나 소득이 적을수록 뚱뚱해질 가능성이 높다. 몸이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은 보건복지부의 의뢰로 2000년 서울의 20세 이상 성인 3878명을 대상으로 비만율을 조사했다. 그 결과 초등학교 졸업자의 50.07%가 비만으로 분류됐고 △중졸 38.36% △고졸 27.23% △대졸 이상 25.05%로 학력이 높을수록 비만율은 떨어졌다. 체질량지수(BMI)가 25 이상이면 비만이며 BMI는 체중(㎏)을 키(m)의 제곱으로 나눈 값이다.

인제대 상계백병원팀이 지난해 서울의 20세 이상 성인 2570명을 대상으로 한 비만율 조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초등학교 졸업자의 비만도를 1로 했을 때 중졸자의 비만도는 0.539, 고졸 0.471, 대졸 이상 0.389로 학력과 비만도는 반비례했다. 월 소득 50만원 이하의 비만도를 1로 했을 때 소득별 비만도는 △50만∼150만원은 1.101 △150만∼250만원 1.065 △250만원 이상 0.808 이었다. 50만원 이하 소득 계층을 제외하면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비만도는 떨어졌다.

선진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비만율과 사회경제적 수준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가 진행돼 왔다. 미국 공중보건 저널에는 1990년대 중반부터 비만과 소득수준간의 관계에 관한 연구논문이 꾸준히 실렸다. 선진국은 소득수준과 비만율이 반비례하고 개발도상국은 비례한다는 내용이다. 어느 사회든 경제수준이 열악할 땐 넘치는 뱃살이 부의 상징이 되지만 사정이 나아지면 말라깽이 몸매가 상류층임을 드러내는 상징 코드가 된다는 것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000년 12월 26일자 ‘헬스&피트니스’ 섹션에서 질병 관리 예방센터의 연구결과를 인용, 인종간 비만율에 차이가 있음을 보도했다. 백인의 경우 비만으로 분류된 비율이 17%인 반면 흑인과 히스패닉은 각각 27%와 21%로 백인보다 높았다.

또다른 미국 연방정부의 통계자료는 소득수준과 비만율이 반비례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소수계층(minority)일수록 비만율이 높아짐을 보여주고 있다. 백인은 연봉이 5만달러(약 6500만원) 이상인 사람들 중 비만인 비율이 16%였고 1만5000달러인 집단의 비만율은 23%로 소득이 낮을수록 비만율이 높아졌다. 흑인은 연봉 5만달러와 1만5000달러 집단의 비만율이 각각 22.5%와 34%로 백인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비만율이 더 높았다.

왜 사회 경제적 수준에 따라 비만율에 차이가 나는 것일까.

상계백병원 가정의학과 이선영 전문의는 “교육과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운동할 여유가 있고 영양학적인 지식도 많아 칼로리 조절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장미혜 전문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 ‘소비양식에 미치는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의 상대적 효과’에서도 이와 비슷한 해석을 찾을 수 있다.

서울에 사는 경제활동 인구 470명을 대상으로 소득과 교육 수준에 따른 식생활 스타일을 조사한 결과 ‘소화가 잘 되는 가벼운 음식을 선호한다’고 답한 비율은 소득수준이 월 600만원 이상인 집단의 경우 87.1%였으나 100만∼200만원인 그룹은 39.4%에 불과했다. 이와 달리 ‘먹어서 든든한 음식’을 선호한다고 답한 비율은 월 소득 600만원 집단은 12.9%, 100만∼200만원은 60.6%였다. ‘음식의 칼로리에 신경쓴다’고 답한 비율도 600만원 이상은 42.9%, 100만∼200만원은 17.1%로 소득이 많을수록 칼로리에 신경을 쓰는 비율이 높았다.

‘정기적으로 운동을 한다’고 답한 비율도 600만원 이상은 82.9%, 100만∼200만원은 49.4%로 차이가 났다. 교육수준에 따른 분석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선호하고 운동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미국 학자들의 분석도 한국과 다르지 않다.

뉴욕타임스는 영양학자들의 말을 인용해 소득과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영양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고 살이 찌지 않으면서 몸에 좋은 음식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며 운동을 많이 한다고 분석했다.

존스홉킨스대 의대 로스 E 앤더슨 조교수는 “8∼16세 청소년들의 텔레비전 시청시간을 비교한 결과 하루 4시간 이상 시청하는 비율이 백인 학생은 26%, 흑인은 42%였다”며 흑인들이 TV를 보면서 덜 움직이기 때문에 비만율도 높다고 해석했다.

또 미 농림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햄버거나 감자튀김을 먹는 비율이 흑인은 28%, 백인은 16%로 사회적 소수 계층일수록 값은 싸지만 다이어트에 좋지 않은 인스턴트나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이어트 산업 종사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다면 힘든 운동을 하거나 음식 조절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돈만 있으면 군살을 붙이고 살 이유가 없다. 세계적인 체형 관리센터인 마리 프랑스 바디라인에서는 부위별로 몸을 ‘조각’해준다. 밴드를 온 몸에 둘둘 감아 살을 빼는 기본적인 래핑 관리가 10회에 77만원이지만 지난해 3월 국내 첫 지점을 오픈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회원수가 4000명을 넘어섰다. 한번에 1000만원어치 관리비용을 지불하는 회원들을 위해 지난해 말에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VIP점까지 오픈했다. 서울 강남 주부들 사이에 ‘세상은 마리프랑스 회원권을 가진 주부와 그렇지 않은 주부로 나뉜다’는 우스갯 소리도 생겼다. 경락 마사지 300만원어치면 5명 중 4명 확률로 출산 전 몸매를 되찾을 수 있다는 설도 제기된다. 한달에 10만∼15만원을 들이면 제니칼 리덕틸 등 약을 먹고 살을 빼는 방법도 있다.

다이어트 산업이 급성장을 하자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리처드 클라인은 저서 ‘포스트 모던 다이어트(원제 지방질을 먹어라·Eat Fat)’에서 “비만은 의사와 영양학자, 몸매 관리사들 때문에 생긴 일종의 의원병(醫員病)일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비만의 범주가 너무 넓게 잡혀 있고 그 위험성이 과장된 탓에 다이어트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지만 효과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음모론의 설득력 여부에 관계없이 분명한 것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통찰했듯이 우리는 “각 사회계급의 구성원들이 자기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몸 관리 방식으로 서로 다른 체형을 생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몸이 계급이다.

글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일러스트 정인성 기자 71j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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