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뒤틀린 가족에 흐르는 징한 사랑 김주영씨 새장편 '멸치'

  • 입력 2002년 2월 18일 17시 59분


‘멸치는 제일 작지만, 고래보다 강직하고 대담한 어족이다.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체로 일생을 살면서도 알을 밴 흔적만은 감추는 은둔자의 삶을 산다.’(작가의 말)

작가 김주영씨(63)가 새 장편소설 ‘멸치’(문이당)를 내놓았다. 98년 펴낸 장편 ‘홍어’에서 그는 말라 비틀어진, 박제된 자유의 상징으로 물고기를 이용했다. 왜 이번은 ‘멸치’일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듯 취급되지만 꼭 있어야 할 미덕을 가진 존재죠. ‘멸치’라는 이름을 통해 역사의 행간에서 배제된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수한 진면목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소설의 배경, 이미지와 문체 등에서 ‘홍어’와 연결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설은 도입부부터 주인공 대섭의 외삼촌과 아버지가 자아내는 팽팽한 긴장관계를 드러낸다. 외삼촌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의붓자식으로 대섭의 어머니와는 실제 혈연관계가 없는 사이. 외할아버지가 죽고 사냥꾼인 대섭의 아버지가 처갓집을 통째로 차지하자 매부 처남의 관계는 소원해진다.

대섭의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외삼촌은 유수지 부근에 움막을 짓고 들짐승처럼 살아간다. 입만 열면 외삼촌 폄훼에 여념이 없는 아버지지만 대섭이 외삼촌의 움막을 드나들어도 묵인한다. 자기가 사냥을 나간 뒤 대섭을 돌봐줄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 이를테면 ‘적대적 의존관계’인 셈이다. 반거짓말이 섞인 대섭의 중재역 때문인지 아버지는 자연지리를 꿰뚫고 있는 외삼촌을 길잡이로 멧돼지 사냥을 나서기로 한다….

“아버지는 외면적으로 허풍장이이고 무책임하며 가치없는 인물이죠. 그렇지만 대섭은 외삼촌에게 그런 것처럼 아버지에게도 애정으로 단단히 묶여 있습니다. 나중에는 어머니도, 이들 사이에 끼어드는 여인도, 심지어 반목하는 듯한 외삼촌까지 아버지와 단단한 끈으로 묶여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홍어’에 이어 이번 작품에도, 어머니의 가출, 제3의 여인, 제 역할을 못하는 아버지 등이 어딘가 비틀린 가족관계를 그려내고 있는 까닭을 물었다. “일제 수탈과 이념대립, 전쟁으로 왜곡되고 찌부러든 것이 지난 세대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도 잔잔히 흐르는 정과 배려, 끈끈한 미움같은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지요.”

그의 작품을 즐겨 읽는 이들은 자연의 체취가 착착 콧내음으로 달라붙는 그의 소설이 ‘징하다’고 말한다. 작가는 경북 청송 출생. 그의 고향 말로는 ‘징하다’를 대신할 만한 표현이 없을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만, ‘징하다’라는 말이 가진 생생한 어감을 대신할 말은 없더군요. 꾸미지 않는 삶,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삶은 분명히 어딘가 ‘징’하죠….”

‘멸치’를 마무리하고 휴식 중인 작가는 나이먹은 사내와 젊은 여인이 사람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갖는다는 내용의 새 장편 ‘미행’을 계획하고 있다. 독립군 홍범도장군에 대한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 수집도 시작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