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보배는]"극성이라지만 아빠도 나서야죠"

  • 입력 2002년 2월 5일 16시 39분


“아빠, 나 목욕시켜줘.”

“나도 머리 감겨줘.”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는 후정이(11)와 지성이(9) 남매는 늘 아빠만 찾는다. 심심해도 아빠, 숙제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어도 아빠다. 젖먹이 시절 새벽에 깨는 아이에게 우유병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매일 저녁 목욕시키는 당번도 아빠였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께 잔정을 못 느끼고 자랐거든요. 아버지는 집안일에 신경을 쓰시지 않았고 어머니는 무척 엄하셨어요. 운동화도 제가 빨아 신고 교련복도 직접 다려 입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장가가면 정말 아기자기한 아빠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주류 수입업체인 메트로라인의 김동률 이사(43)는 남매가 다니는 월촌초등학교에서도 별난 학부모로 통한다. 학교에서 급식 당번으로 엄마 류미선씨(36)를 호출했을 때 아내를 대신해 앞치마를 두르고 아이들에게 국과 밥을 퍼주었기 때문이다.

담임교사는 “교사 생활 20년만에 급식 당번으로 아버지가 온 건 처음이다”며 놀라워했다. 학부모들은 “지성이 아빠와 같은 조에 넣어달라”는 주문을 하며 김 이사를 반겼다. 급식 당번 세 사람이 교실 청소까지 해야 하는데 힘이 센 남자가 끼어 있으면 일이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라는 것.

“유학을 하고 돌아와 저는 놀고 있었고 약대를 나온 아내는 집 근처 약국에서 시간제로 일하느라 바빴거든요.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저는 좋았어요.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교육받는지 아빠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 이사는 96년 1월 회사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매체경제학 박사학위를 딴 뒤 지난해 3월 귀국했다. 유학 시절에도 오후 5시가 되면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매일 2시간씩 아이들을 붙들고 영어를 가르쳤다.

바이올린 스키 수영 승마 골프 등 미국에서 싼 값에 배울 수 있는 예체능 과외도 빠뜨리지 않고 시켰다.

“아내는 낮 시간에 아이들에게 한국의 교육과정을 가르쳤어요. 저는 공부를 하고 있었고 아내도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형편이라 고단했지만 아이들 교육만큼은 양보하지 않았어요.”

올 1월 회사의 중역이 돼 바쁜 몸이 됐지만 김 이사는 오후 7시반이면 어김없이 퇴근해 아이들 공부를 돌본다. 미국에서 사온 영어책과 어린이 한자책을 놓고 매일 일정 분량씩 지도한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영어 TV 프로그램을 체크해 보여주는 것도 김씨의 주요 일과 중 하나.

“미국에서는 시험을 너무 자주 봐서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이었는데 한국에 오니 시험이 없더라고요. 아이가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지 답답할 때가 많아요.”

경기가 호전 기미를 보이면서 회사 일도 점점 바빠지고 있다. 하지만 ‘극성스러운’ 아빠의 역할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게 김 이사의 다짐이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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